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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계엄 선포 후 격동의 한국 정치를 특징짓는 유의미한 현상 중 하나만 고르라면 '보수의 극우화'다. 한국의 보수는 탄핵 혼란에 편승해 극우의 주류화와 권력화 단계에 접어들었다.(신진욱·중앙대 교수) 이제 '극우 담론'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해선 안 될 상황에 직면한 셈이다. 보수 전체를 폄훼하거나 악의적 프레임을 씌우려는 의도는 물론 아니다.
보수 격변기에 텃밭 TK인들 온전할 리 없다.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곳, 보수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곳이다. 보수 보루 TK의 정치 지형은 머지않아 '보수 극우화'의 거친 물살에 휩쓸릴 것이다. 이미 야당은 수구의 심장, 극우의 온상이라 공격해 왔다. 'TK가 변하면 보수가 변한다'는 구호는 여전히 유용한 것일까.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이 극우화로 급선회하는 세계적 추세와 무관치 않다. 트럼프 정부의 정부효율부 수장 일론 머스크는 환호하는 지지자들에게 오른손으로 가슴을 친 뒤 손가락을 모은 채 손을 대각선으로 들어 올리는 인사를 했다. 나치식 인사다. 독일 극우 정당 AfD의 대표와 대담하면서는 유권자들에게 AfD에 투표하라고 촉구했다. 공개적이며 노골적인 극우 행보다. 미국의 주류는 지금 이렇게 변하고 있다. 관용과 개방, 공존과 같은 선(善)한 시대정신은 점점 힘을 잃고 있다. 극단을 부추기는 인터넷 알고리즘, 세속 정치와 결탁한 종교, 짙어진 신냉전과 미·중 대결,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트럼피즘과 국수주의의 발호로 인해 증오와 갈등, 어둠의 가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하고 있다.
끔찍한 전조를 봤다.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한 이른바 '투블럭 남'. 이 남성은 누군가에게 수신호를 보내는가 하면 일군의 청년들과 함께 판사실이 있는 건물 위층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급기야 인화 물질을 건물 안에 뿌리고 종이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면이 유튜브 영상을 통해 드러났다. 이 청년의 지휘 아래 몇몇 청년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도 포착됐다. 놀랍게도 그는 앳된 10대였다. '투블럭'이 뭔가. 낯익은 나치 헤어스타일이다. 나치의 주력도, AfD의 기반도 2030들이다. 불길한 예감이 스친다.
어떻게 10대가 판사를 잡겠다고 생각했을까. 이 위험한 의식의 세례(洗禮)는 누구로부터 받은 것일까. 이들에게 왜 갑자기 증오할 적이 생겼는가. 스스로 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엄숙한 사명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들의 의식화를 도운 숙주의 정체는 무언가. 이들을 부추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징치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격동시켰을까. 가장 무서운 게 종교와 정치의 결합이다. 둘이 결합하면 모든 걸 정당화한다. 분신, 자폭 같은 인간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들도 다 된다. 한국의 극우가, 종교가 지금 그 목전에 와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극우 담론)'는 계속돼야 한다. 조기 대선이 있어도 걱정이다. 자칫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다. 내란은 끝나지 않았고, 내전은 이제 시작처럼 보인다.
갑갑하다. 한강(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물음에서 답을 구해보자.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모든 역사적 경험이 오늘의 반면교사요 구원자다. 12·3 계엄 후 과거가, 죽은 자가, 현재와 산 자를 구하는 기적을 보고 있다. 희생과 헌신으로 점철한 질곡의 우리 역사에 감사할 일이다. 이재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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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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