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일로부터 1천 번째 되는 날 겨울 초입의 12·3 계엄, 그로부터 108일간 이어진 탄핵정국, 어제 막 춘분을 지났으니 바야흐로 봄의 초입, 겨울 한철 꽉 채운 혼돈의 시간 끝에 섰다. 108일간의 격랑은 매일 하나씩의 회(悔·후회)나 분(忿·분노)을 낳아 108번뇌의 결업(結業)을 완성한 듯하다. 지긋지긋한 겨울나기다. 번뇌가 곧 보리(菩提·깨달음)라지만 아직 혼란의 한복판, 여전히 평안은 없다. 힘겹지만 감당할 만한 고통을 준 오늘의 역사에 감사한다.
작금 대한민국의 운명은 헌재가 쥐고 있다. 다음주는 여·야 1인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전략적 선택'인가. 이재명 대표 2심 선고(3월26일) 전후에 탄핵 인용이든 기각이든 나오는 것이 사회적 불만·불안을 좀 더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거다. 소위 '열기(熱氣) 빼기' '중화(中和)효과'이다. 헌재가 정말 이 정도 정치적 고려까지 하는 걸까. 노무현·박근혜 탄핵심판에 걸린 기간(63일·91일)은 진작 넘어섰다.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신속 심리하겠다던 약속은 허언이 됐다. 문득 '배설의 시간은 짧아야 한다'라는 지당한 건강 상식이 삶의 지혜, 역사적 훈계로 심심(深深)이 와닿는다.
어제 야당이 30번째 탄핵을 추진하자 당사자인 최상목 대행이 '자진사퇴 카드'로 반격했다. '대행의 자진사퇴'가 실제 이뤄진다면 헌정사 또 하나의 기록이 되겠지만, '대통령 대행'의 사퇴서를 누가 받을지 불분명하다. 윤석열 정부도 떳떳지 못하다.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이 40개나 된다.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을 강행한 횟수만도 30번이다. 모두 '법을 이용한 정치폭력'이다. 그래도 이때까진 법 테두리 안의 공방이었다. 이젠 아니다. 헌재 결정 후엔 전혀 다른 양상의 싸움이 기다린다.
다가올 싸움은 '비법률적 방식의 명예회복'이라 쓰고 '민란'이라 읽는다. 이 고상한 수사(修辭)는 감옥의 조국 전 장관이 먼저 사용했다. 말 속에 감춰진 폭력성과 복수의지가 읽히는가. 유인태 전 의원은 “윤 대통령이 조국의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고 했다. “광장에서 한 번 뒤집어보겠다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분명 비법률적 방식이다. 여·야는 '헌재 결정 승복'을 공식화했지만, 윤 대통령만 묵묵부답이다. 그의 승복 없인 말짱 도루묵이다. 되레 윤 대통령의 대선 직접 출마 괴담까지 나돈다. 이재명 대표도 다음 주 2심 재판에서 유죄가 나오더라도 이를 뭉개고 대선을 끝까지 완주할 태세다. 조국 방식의 이재명 버전이다. 윤(尹) vs 이(李) 리턴매치? 모두 물속 달그림자를 쫓고 있다.
장외집회가 더 격렬해지고 정치인 살해 협박까지 나온다. 불신을 증폭해 광장 세력을 결집하고 광신도의 함성에 고무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광장에 얹혀가는 정치는 정치이길 포기한 것이다. 탄핵 선고 후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면 우리는 회복 불능의 나락에 떨어진다. 그게 탄핵보다 더 무섭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즉시 '승복'을 선언하고 지지자들도 설득해야 한다. 선거와 재판 결과에 승복하는 것, 권력 쟁취를 위해 폭력을 쓰지 않는 것, 극단주의 세력과 연대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소한의 약속이다. 광장 민주주의, 거리 민주주의에 취해 성공한 나라는 없다. 여·야가 그 맛에 중독된 건 불행이고 불길한 징조이다.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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