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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논설위원 |
'폭싹 속았수다'가 넷플릭스 비(非)영어 글로벌 1위 드라마(지난주 기준)에 올랐다. '폭싹 속았수다'는 '완전히 속았다'쯤으로 이해했는데 뒤늦게 '매우 수고하셨습니다'의 제주 방언임을 알았다. 폭삭 속았다. 영어 제목에 더 반전 있다.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tangerines는 '감귤'이다. 삶이 너에게 감귤을 줄 때? 제작사는 '인생에 시련이 왔을 때'로 의역했다. 영어 속담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인생이 시큼한 레몬(시련)을 주면, 그것으로 달콤한 레몬에이드를 만들라'는 뜻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영어식 버전이랄까. 미국 대표 과일 '레몬'을 제주의 상징 '귤'로 살짝 바꾼 감각이 돋보인다.
# 아포페니아
같은 기간 넷플릭스 비영어 영화 시청 1위 역시 한국 작품이다. 연상호 감독, 류준열·신현빈 주연의 '계시록'.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는 목사와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담당 여형사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범죄자. 이 세 사람을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면 중 특이한 심리학 용어가 딱 한 번 지나간다. 아포페니아(Apophenia). 서로 연결성·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억지로 일정한 규칙이나 의미를 찾아내려는 경향을 일컫는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것이 분명했다.
범죄자는 비극의 원인을 괴물이라고 하고, 목사는 신의 계시라 하고, 형사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한다. 이게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다. 사태의 원인을 하나의 대상에서 집요하게 찾으려 한다. 의사가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배가 떨어지죠, 기어이 까마귀를 만들어냅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을 말한 것이다. 심리 현상만 아니다. 계엄·탄핵 정국에서도 목도했다. '고레스 왕'의 현신(現身), 중국의 선거 개입, 남침 유발 작전, 정치인 수장(水葬), 호마(護摩) 의식, 산불 간첩 연관설, 트럼프가 대통령을 복귀시킬 것이란 믿음, 중국 간첩 99명 압송, 3일 윤(尹) 하야 같은 터무니없는 망상이 다 아포페니아류 병리 현상이다. 지금의 혼돈은 그릇된 믿음이 만든 파국이다. 4·2재보선은 여당에 "바꾸라"라는 시그널을 보냈다. 시장·군수·구청장 5곳이 4:1에서 1:4로 역전됐다.
# 4월4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12·3 계엄부터 122일, 탄핵소추 후 111일 만이다. 긴 시간 초조한 밤을 견뎌낸 국민 모두 폭싹 속았수다. 오전 11시 선고를 시작해 주문을 읽기까지의 약 30분간. 혼돈의 끝일까 또 다른 혼돈의 시작일까. 챗 GPT는 '인용' 가능성이 90%(2일자 '뉴스1')라 예측했지만, AI의 합리적 추론이 '다이내믹 코리아'의 불가측성까지 참량(參量)했을지는 의문이다. 오늘은 혼란의 마침표, 국민적 상처 치유의 시작점이 돼야 한다. 그릇된 믿음이 지배하는 아포페니아의 세계로 다시 회귀해선 안 된다. 헌재 선고가 누구에게는 달콤한 레몬에이드를 선사하겠지만, 누구에게는 시큼한 레몬이 될 터이다. 그러면 어떠하랴.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논설위원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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