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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珍의 미니 에세이] 모롱이

2025-04-04

오로지 사람만이 다니는 길

설익은 내 젊은 날이 있는 곳

꿈, 사랑, 환상이었던 모롱이

세월 흘러선 '다른 여기'일 뿐

[少珍의 미니 에세이] 모롱이
우수 경칩이 지나니 겨우내 잠든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아침저녁 아직 바람이 차고 봄은 먼 듯하지만 새벽 산책을 나선다. 하늘은 멀고 공원은 희뿌옇다. 나무도 풀도 호수도 조용하다.

새벽을 가르며 천천히 공원을 거닌다. 모롱이를 지난다. 나는 이 모롱이를 좋아한다. 여기서부터는 보행자의 길이다. 차도 자전거도 운행이 금지되어 있다. 오로지 사람만이 다니는 길이다.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조심하지 않아도 되고 두 팔을 마음껏 흔들며 활보할 수 있다.

또 있다. 모롱이에는 설익은 나의 젊은 날이 있다. 대학 시절 강의실 밖은 야산이었다. 강의 도중 창밖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산모롱이가 보였다. 구불구불 S자로 된 제법 긴 모롱이였다. 봄바람 불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나의 가슴은 모롱이를 향해 설레었다. 모롱이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가 있을까.

비 온 뒤 산모롱이에서 무지개라도 뜨면 증상은 심화되었다. 나는 그 모롱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삶의 모든 아름다움과 선, 빛나는 가치가 모롱이 뒤에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백마 탄 기사가 손을 흔들며 나올 것도 같았다. 모롱이는 나에게 꿈, 사랑, 환상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때 그 산자락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많은 모롱이에 머물거나 지나쳤다. 그때마다 나는 어리석게도 무지개를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모롱이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었다. 심지어는 비밀조차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낯선 장소에 불과했다. 모롱이는 '다른 여기'일 뿐이었다.

날이 밝아오면서 공원이 붐비기 시작했다. 나는 팔을 힘차게 흔들며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남쪽에서는 매화 소식도 있던데 언제쯤 꽃이 피려나?

모롱이 쪽에서 수상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매화였다! 바로 거기, 한 뼘의 양지에서 웅크리고 있던 매화나무가 온 힘을 다해 팝콘처럼 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공원 내에서 가장 먼저 핀 꽃이었다.

나는 급히 꽃을 향해 다가갔다. 벅찬 감동으로 그 자리에 한참을 머물렀다. 내 안에 잠든 철없는 무지개가 또 다시 기지개를 켜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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