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부터 국채보상운동 참여
중국 망명 후 각종 단체 간부로 활약
무장·선전·밀정 색출 등 전략적 기획자
상하이방송국에서 방송으로 일제 실체 폭로

배천택의 국민대표회의 활동 관련 동아일보(1923년 2월 17일자) 보도. 출처: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대구 동구 효목동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 앞에 세워진 동상. 배천택 등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독립투사들을 형상화했다. 박영민기자.
국외독립운동가 동상.

국외독립운동가들의 동상 뒤 배천택을 소개하는 글이 적혀있다. 박영민기자.
배천택, 좌우합작의 대독립당 건설운동을 앞장서 이끌다.

배천택 선생 연혁. 출처:공훈전자사료관
대한민국이 광복 80주년을 맞았다. 영남일보는 '내 이름은 투사' 시리즈로 대구를 빛낸 독립운동가 12명을 월별로 조명한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소개할 독립운동가는 임시정부와 의 무장·선전 등 독립운동과정의 중심에서 맹활약한 배천택(裵千澤·1892~미상) 선생이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중국 만주로 망명해 평생을 조국 독립에 몸바친 투사다.
◆ 대구수창학교 소년에서 중국 만주의 독립군 간부로
1892년 9월 27일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난 배천택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애국심을 갖고 있었다. 사립 수창학교(현 수창초등학교)에 다니던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자발적으로 1냥을 의연금으로 내며 동참했다. 일제탄압에 순응하지 않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활동했다.
청년기에는 경성공업전습소(현 서울대 공과대학 전신)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공업대학에 잠시 등록했다. 유망한 기술자의 길을 앞에 두고도,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독립운동의 길을 택했다.
배천택은 1909년 남형우·안희제·김동삼과 함께 대동청년당을 결성하며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일제의 한국 병탄이 가시화되던 1910년엔 중국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정했다. 이어 '신흥무관학교'와 '부민단' 등에서 군사훈련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6년에는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가 사진업을 하던 중 미국에 있던 박용만·노백린의 요청을 받고 상하이로 잠입했다. 여기서 한인사회의 실태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어 서간도로 이동해 '서로군정서'와 '군사통일촉성회' 결성에 참여하며 신뢰받는 간부로 성장했다.
◆ 임시정부, 다물단 등에서 '브레인'으로 활약
1920년대는 임시정부에 깊게 관여했다. 1921년에는 이승만이 미국에 위임통치 청원서를 쓴 사실에 반대해 성토문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박용만이 세운 '대조선공화국'의 임시정부에선 군무총장으로 지명됐다. 하지만 이 조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3년 1월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그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회의 비서장으로 선출됐다. 배천택은 기존 정부를 유지한 채 부분적으로 구조를 바꾸자고 주장한 '개조파'의 간부로 활동하며 군사분과위원도 겸했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 간 갈등으로 결국 결렬됐다.
그러나 배천택은 물러서지 않았다. 같은 해 3월 남형우·김동삼과 함께 '국민당'을 창당해 선전부장을 맡았다. 국민당은 무장 독립전쟁을 준비하며 군자금 모집, 군사 간부 양성, 모험단 조직 등을 활동지침으로 삼았다.
그는 베이징 북성 피구호동 18번지를 거점으로 삼았다. 대구 출신 서동일·이상도를 영입하고 활동 자금을 모으는 전략을 수립했다. 서동일을 경북 경산과 청도군에 파견해 모금한 1천100원은 당원들의 생계와 활동비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의 활동영역은 군자금 모금에만 그치지 않았다. 한인사회 내 밀정과 친일세력을 색출하며 내부 정화에 힘썼다. 간토대지진 당시 일제의 한인 학살을 고발하는 문서 '학살'을 제작해 배포했다. 또한 '시일야대외선언' 등 항일의식을 담은 선전물을 베이징 각국 공사관과 단체에 배포하며 여론전을 펼쳤다.
대구에서 온 이정기에게 폭탄 제조법을 전수하는 등 무장투쟁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그야말로 배천택은 전략적 기획자이자, 독립운동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1925년 4월 그는 유우국·한진산·서왈보 등과 함께 비밀결사 '다물단'을 결성했다. 다물은 '잃은 땅을 되찾는다'는 고구려 말인 동시에 '입을 다물고 행동한다'는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
다물단은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반역자, 밀정을 처단하는 데에도 중점을 뒀다. 이들은 결성 한 달만에 베이징의 거물이자, 일제 앞잡이 역할을 하던 김달하를 처단했다. '악분자 소탕 선언'이라는 문서도 수 천부 인쇄해 베이징 전역에 뿌렸다. 이후에도 배천택은 서동일을 통해 군자금 조달을 지시했고, 중국의 항일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배포하는 등 지속적으로 여론전을 펼쳤다.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됐을 때도 참여해 각 독립운동단체들의 세규합을 위해 노력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며 배천택은 조직가로서의 역할을 더 넓혀갔다. 한국혁명당·신한독립당·민족혁명당 등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정당에 참여했다. 당 조직의 통합과 운영을 위해 중국 상하이·난징·톈진을 넘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 김구 등과도 긴밀히 교류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상하이 방송국에서 윤세주와 함께 매일 저녁 30분간 '일본 민족에게 고함' '조선 민중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진행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해 일본 제국주의의 위선을 폭로하고, 조선의 현실과 저항 의지를 세계에 알렸다.
◆ 얼굴도 묘소도 남지 않은 투사…그 이름은 남아 있어
배천택 선생은 1942년 끝내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묘소나 후손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얼굴도 어떤 모습인지 전혀 자료가 없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엔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2022년 11월에는 국가보훈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배천택 선생이 유년시절을 보낸 대구에도 그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학창시절을 보낸 수창학교는 지금도 수창초등학교로 남아 있지만 현재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이어서 그의 이름을 기리는 공간은 따로 없다. 다만, 대구 동구 효목동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선 배천택이란 이름 석자를 확인할 수 있다.
기념탑 왼편엔 중국에서 활동한 국외 독립운동가들을 형상화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얼굴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중국에서 활동한 투사들이 어떤 모습으로 활동했는지는 엿볼 수 있다. 동상 뒤 비석에는 배천택 선생을 두고 '좌우합작의 대독립당 건설운동에 앞장섰다'는 문장이 있다. 일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친 배천택 선생의 열망과 활동상은 후손들에게 마땅히 기억돼야 할 것이다.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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