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처음에는 이 무슨 외래어인가 했다. '졌잘싸'라니? 한참 후에야 선거에서 참패한 당이 스스로를 '졌지만 잘 싸웠다'고 자평한데서 나온 말임을 알았다.
온갖 꼼수와 날치기로 점철된 당이었지만 '참패'를 두고는 당 내부에서조차 '위기'라는 파열음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당의 텃밭인 광주 투표율이 지방선거 시·도 중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 것을 두고는 '당에 대한 정치적 탄핵'이라며 '아픈 참패'라고 하는 판국에 정작 당사자들은 '졌잘싸' 운운하고 있었다. 반성 없는 자기합리화가 국민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졌잘싸'에는 내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은 모두 평범했다. 잘 나지도 못나지도 않다 보니 나이 또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무슨 일을 하든 완성도가 낮았다. 허술하고 미흡했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사회문제에서 외양간이 있는 그림을 보여주고, '위의 그림은 시골집입니까? 도시의 집입니까?' 라고 물었다. 답은 '시골집'이었지만 딸은 '촌집'이라고 써서 틀렸다. 친구 엄마는 선생님한테 말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질문은 분명히 시골집인가 도시의 집인가 물었던 것이다.
아들은 어떻든가. 이 아이는 완성도까지 이르지도 못했다. 선택과 집중부터 문제였다. 초등학생 때는 '43–18'이 골치 아픈 나머지 8에서 3을 빼고 40에서 10을 빼고 그쳤다. 그나마도 시험지 뒷면은 풀지도 않고 후다닥 달려가서 제일 먼저 시험지를 제출하는 만용을 보였다. 시험지를 1등 제출하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했던가. 내 아이들의 '졌잘싸'는 무엇이었을까. 생의 마디마디 완성도가 부족하고, 선택과 집중이 잘못된 내 아이들의 '졌잘싸'는 어찌해야 할까.
나는 몇 년 전 본 브라질과 한국의 축구 경기를 기억한다. 그 경기에서 나는 내 생애 최고의 멋진 '졌잘싸'를 보았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브라질의 친선 축구 경기에서는 1:5로 한국이 졌다. 6만이 넘는 관중들이 아쉬움으로 자리를 못 떴으나 주장인 손흥민은 당당했다. 아름다운 청년 손흥민은 능숙한 영어와 한국말로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그는 브라질의 네이마르 선수와 유니폼을 바꿔 입으며 그를 한껏 추켜세웠다. "네이마르는 월드 스타이고, 저는 월드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입니다."
나는 만난 적도 없는 손흥민에게 마음껏 손뼉을 치며 사랑과 응원을 보냈다. 참패를 당하고도 자기 성찰 없이 '졌잘싸'를 내세운 정치인들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을까.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