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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전세계서 K-오페라 주목…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큰 역할 했죠”

2025-06-24 18:02

출향인사를 찾아서/ 대구 출신의 서상화 국립오페라단 경영관리팀장

청구中 시절 테너였던 음악교사 흠모
부모 반대 딛고 음대 진학해 獨 유학

궁핍했던 살림에 구립극장 기획자로
토요상설공연 등으로 새바람 일으켜
국립합창단 팀장 자리로 옮겨 서울행
매일 예술의 전당 오가며 인맥왕까지


서상화 국립오페라단 경영관리팀장이 대구에서 기획자로 활동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포즈를 취했다.  <서상화 제공>

서상화 국립오페라단 경영관리팀장이 대구에서 기획자로 활동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포즈를 취했다. <서상화 제공>


대구시는 국내 최초로 2003년 오페라 전용극장인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했다. 오페라의 개념조차 미미하던 지역에서 '국제오페라축제'를 열어 관객의 외연을 넓히고, 유럽의 극장들과 지속적인 교류행사를 펼치고 있다. 불과 20여년 만에 대구가 한국을 대표하는 오페라도시로 우뚝 선 것이다. 서상화 국립오페라단 경영관리팀장은 "한국의 오페라는 단기간에 눈부신 성장을 거둬 어느새 전세계가 주목하는 시장이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 전문예술단인 '국립오페라단'과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양대 축으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수도권에 몰린 국립예술단 지방 이전

균형발전 이루고 문화 접근성 높일것"


◇BTS 부럽지 않았던 음악 선생님


그가 음악을 처음 접한 건 청구중 재학 때였다. 해외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한 음악 선생님은 까까머리 중학생의 눈을 확 뜨이게 했다. 멋있는 의상과 고급진 유머, 무엇보다도 좌중을 한번에 사로잡는 노래실력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 눈에 비친 손정희 선생님은 그야말로 BTS, 빅뱅 부럽지 않았어요. 테너였던 선생님은 훗날 대구 오페라 무대에서 실력파 음악인으로 중추적 역할을 하셨죠. 선생님을 흠모하면서 음악가의 꿈을 얻게 됐어요"


하지만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부모님의 반대가 거셌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레슨을 받을 수도 없었다. '포기'를 고민할 즈음 의외의 구원군이 나타났다. 그의 고민을 알게 된 교회 형이 음대에 다니는 친구를 소개해 줬고, 마침내 영남대 음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살면서 뭔가를 그렇게 좋아했던 적이 없을 거에요.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들었어요.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면 두근두근 삶에 환희가 느껴졌어요. "


1997년 독일 함부르크로 유학을 떠났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현실은 혹독했다.


"독일에서 진짜 안해본 일이 없었어요. 새벽 3~4시쯤 집에서 나와서 신문 돌리고, 집에 와서 후다닥 밥 먹고, 다시 항구 근처 공사장에 나가서 일하고. 틈틈이 악기 연습하고…. 몸은 힘들었지만 꿈이 있으니 행복했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경험들이 제 인생의 큰 자산이 되지 않았을까요?."


◇연주자에서 행정가로 방향 전환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교인 영남대에 출강하며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도모했다. 안타깝게도 살림은 늘 궁핍했다.


"유학 가서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았는데, 결국 부모님 도움을 받았어요. 강의를 두 곳쯤 뛰었는데, 기껏해야 한달에 50만원을 벌었어요. 앞길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즈음 지도 교수님이 대구 북구문화예술회관의 기획자 공고를 보여주면서 추천하셨죠."


요즘은 한국의 공연장마다 전문 프로그래머를 두고 있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구청 공무원들이 행정과 기획업무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대부분 공연장들이 획일적이고, 평이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됐다. 이런 가운데 기획자로 발탁된 그는 공연장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구립극장에 전문성이 가미된 프로그램으로 센세이셔널한 바람을 일으킨 것.


"사실 무언가를 시도하기 힘들 정도로 빈약한 예산이었어요. 바리톤 고성현, 첼리스트 양성원, 피아니스트 김선욱, 바이올리니스트 피호영 같은 유명인을 초청했는데 대구 전역에 입소문이 확 퍼졌지요. 이 뿐 아니에요. 매주 토요일마다 천막을 치고 '토요상설공연'을 열었는데, 대박이 났어요. 공연에 목말랐던 동네 주민들이 비가 오고, 눈이 와도 공연을 찾아주셨죠. 기획자로서 누리는 최고의 행복을 느꼈습니다."


기획자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그는 국립합창단 기획공연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또한번 남다른 선택을 한다. 매일 퇴근후 집이 아닌 예술의 전당 공연장 앞으로 간 것. 오고 가는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한명 두명 아는 얼굴이 늘기 시작하더니 몇 달 후에는 왠만한 음악인, 기자, 동호회, VIP 관객을 모두 꿰는 수준이 되었다. 현재도 그의 핸드폰 주소록은 다양한 분야의 지인들로 채워져 '인맥왕'의 면모를 보여준다.


"제 역할이 공연기획팀장이었는데, 사실 프로그램은 지휘자께서 다 하셨으니 제가 할 일은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 나름대로 발굴한 분야가 우리 단체의 이미지를 알리고, 티켓을 팔고, 공무원과 행정적 교류를 원활하게 하자는 것이었어요. 그때 단기간에 정말 많은 이들을 만났어요.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웃음) 힘들어도 일하는 맛이 있어 힘들지 않았어요."


◇대구, 세계적 오페라 도시로 도약


2003년 국내 최초로 오페라하우스를 개관한 대구시는 세계적인 오페라 도시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연주자에서 기획자, 국립합창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국립오페라단 경영관리팀장을 맡은 그에게 대구 오페라계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독일의 오페라 극장을 가보면 직원이 700~800명이에요. 극장이 예술인들의 일자리 해소에 톡톡한 역할을 하죠. 성악가와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단, 의상기술자 등이 모두 한 극장에 소속돼 움직이면서 극장마다의 색깔이 만들어집니다. 공연 때마다 매번 연주자가 바뀌는 한국의 오페라계가 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이런 가운데 정부는 올해 국립예술단의 지방이전을 주요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우선 서울예술단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으로 옮기는 것을 확정지었다. 또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현대무용단, 국립합창단 등 추가 이전도 계획중이다. 대구가 20여년 이상 오페라도시에 공을 들인 만큼 지역 예술계는 국립오페라단의 대구이전을 바라고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국립예술단을 지역으로 이전함으로써 국가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전국민의 문화 접근성까지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전공한 악기인 트롬본은 U자형의 관을 입으로 불어 소리를 낸다. 예술 행정가이자 기획자의 길을 걷는 요즘도 그는 가끔 트롬본 봉사활동을 한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까지 물었다.


"음악인들이 하는 말이 있는데, '사람 성격이 악기 따라간다'는 거에요. 트롬본은 저음도, 고음도 아닌 중간 음색을 가졌지요. 트롬본 3명이 화음을 맞추면 꽤 중후하고, 멋져요. 그런 이유에선지 오케스트라 총무도 트롬본 연주자가 맡은 경우가 많아요. 중간자로서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것이 음악에서든, 행정가로서든 제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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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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