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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광복 80주년 기획 내 이름은 투사 .7] 親日 숙부 집서 자란 소년…첫 女의열단원이 된 기생

2025-07-09 21:15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현정건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선언서.

올해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는 '내 이름은 투사' 시리즈를 통해 대구를 빛낸 독립운동가 12명을 월별로 조명한다. 7월의 인물은 일제강점기때 조국을 위해 삶을 내던진 두 사람이다. 정치와 사상의 최전선에서 싸운 지도자 현정건(玄鼎健·1893~1932), '기생'이라는 편견을 넘어 직접 무기를 든 여성 투사 현계옥(玄桂玉·1897년~?). 불가능에 가까웠던 여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독립운동 실천 노력은 더 빛난다.


◆ 명문가에서 자란 소년이 선택한 독립의 길


현정건은 1893년 6월 29일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났다. 중인 가문 출신으로 집안엔 역관·의관 등 전문직 종사자가 많았다. 형제들도 모두 군인·법조인·소설가 등 엘리트의 길을 걸었다. 그의 동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소설가 현진건이다.


그는 13세에 서울에 있던 숙부 현영운의 집에서 유학하며 배재학당을 다녔다. 숙부는 일본 유학 후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와 재혼했던 인물이다. 중추원 의관과 태복사장(현재 차관급)을 지낸 대표적인 친일 고위관료였다. 그런 숙부의 집에서 자란 현정건은 뜻밖의 길을 택했다.


18세때인 1910년 그는 윤덕경과 결혼한 뒤 홀로 상해로 떠났다. 정확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의 억압에 대한 반발과 망국의 충격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에선 6촌 형 현상건의 집에 머물렀다. 현상건은 초기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가 이후 일제에 협조하는 인물로 변절했다. 이 사실에 크게 실망한 그는 현상건과 결별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1919년 3·1운동 직전. 현정건은 독립 운동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다시 풀려난 그는 유명기생 '현계옥'과 함께 상해로 돌아간다.


상해에서 그는 임시의정원 제6회 회기 중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된다. 같은 해 이동휘·김립 등이 이끄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참여한다. 당시 '화요보'라는 기관지의 주필을 맡으며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1922년 임시정부의 방향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선 고려공산당 대표 2명으로 선임돼 참여했다. 1924년에는 청년동맹회 집행위원 11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며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했다.


1926년 현정건은 상해에서 한인 청년들의 중국 대학·군관학교 입학을 주선하고 자격심사도 주관했다. 후세대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당시 교민 사회에서 영향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같은 시점, 중국 곳곳에서 좌우로 나눠진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자, 여기에 적극 가담한다. 그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와 5개 촉성회가 모인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의 집행위원으로 가담했다.


하지만 1928년 봄. 프랑스조계당국과 중국경찰이 공산주의에 경계심을 갖게되자, 여기에 편승한 일제 당국은 무차별 체포 작전을 벌였다. 결국 상해 패륵로에서 체포됐다. 이후 국내로 압송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만들고 활동했다는 게 혐의였다.


그는 1932년 6월 만기 출옥했지만 각종 고문과 옥고에 따른 후유증으로 복막염을 앓았다. 결국 출옥 6개월만에 그는 경성의전 병원에서 세상과 이별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피디아

현계옥 사진

출처: 동아일보디지털아카이브

출처: 동아일보디지털아카이브

현계옥의 독립운동 관련 신문기사(동아일보 1925년 11월 6일 지면)

◆ 유명 기생에서 독립투사로…현계옥의 선택


현계옥은 1896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서 가곡과 글을 배웠다. 당시 전통 공연예술의 전승자였던 기생을 일본식 창기로 변질시키던 문화를 피해 아버지는 현계옥과 함께 대구로 이사오게 된다. 대구에서 현계옥은 기생으로 활동하며 뛰어난 노래와 춤 실력을 뽐내며 큰 명성을 얻었다.


1913년쯤 현계옥은 중국에서 잠시 귀국한 현정건을 만난 후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기혼자이면서 당시 상해에 거주하던 현정건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계옥은 상해로 가기 위해 서울로 둥지를 옮겼다. 서울에서도 현계옥은 '72가지 춤을 출 수 있고, 한문을 알면서 글씨 잘 쓰기로는 어느 기생도 감히 대적할 이가 없었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졌다.


1919년 현계옥은 기다리던 현정건을 마주하게 된다. 현정건이 밀입국을 통해서울로 오게된 것. 현계옥은 이때 현정건에게 자신을 '동지'로 대해달라 애원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길림에서 현정건과 합류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김원봉을 찾아가 의열단에 여성 최초로 입단했다. 처음엔 거절당했지만, 굳건한 결의를 보인 끝에 입단을 허락받았다. 근처 사격장에선 김원봉에게 권총사격과 폭탄투척 훈련을 받았다.


이후 현계옥은 각종 작전에 본격 투입됐다. 주로 양장을 입고 서양인 남성과 중국인 여성 부부로 위장해 폭탄을 운반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현계옥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뛰어난 영어 실력을 구사하는 등 기지를 보였다.


1924년 청년동맹회가 창립되자 가입했다. 여기서 현계옥은 현정건과 함께 '여자해방' 잡지 발간을 주관하며 한국여자해방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현정건이 일제에 체포된 후 현계옥은 모스크바로 간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행적에 대해선 기록이 없다.


박영민 기자.

박영민 기자.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 인근 기념비석에 새겨진 현정건의 이름.

◆ 사라진 그들의 터전, 남은 이름


현정건의 생가터는 대구 중구 인교동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장을 알리는 표지나 기념물은 없다.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새겨진 곳은 동구 망우당공원 인근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뿐이다. 그와 함께 생을 마친 아내 윤덕경은 1933년 2월, "죽은 몸이라도 함께 묻히고 싶다"는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셨다. 부부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았다. 현정건은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현계옥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대구 중구 상서동 만경관 인근에 그가 소속됐던 대구기생조합의 후신 '달성권번'이 남아있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 일대에는 현재 식당 등만 있다. 그는 영화 '밀정' 속 연계순(배우 한지민 분)의 실제 모델로 언급되기도 했다. 아직까지 공식 서훈은 받지 못한 상태다.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는 "현정건은 격랑의 시대 속 민족혁명가로서 초지일관 비타협적 항일행보를 보여줬다. 특히 좌우합작 조직에서 돋보이는 역할을 했던 점은 그가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실천적인 독립운동가임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계옥은 1910년~1920년대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의 한 여성이 탈식민적 각성의 터널을 스스로 뚫고 가며 감당해냈다. 독립운동 후 행적이 불명하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역사에서도 잘 기억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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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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