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기 접어들었지만 출하 막막
긴 열대야에 안토시아닌 부족…유통상인 계약 해지 잇따라
포도재배 농민이 여름철 야간의 기온 상승으로 색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포도와 정상인 포도를 보여주고 있다. <상주 포도 농가 제공>
9월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경북 상주시 모동면의 한 포도 농장. 추석 대목을 일주일 앞둔 시점이지만, 수확용 플라스틱 상자는 밭 한구석에 흙 먼지만 쌓인 채 겹겹이 포개져 있다. 예년 같으면 검은 빛이 돌아야 할 캠벨얼리 포도 송이들이 생기를 잃은 붉은 보라색을 띤 채 가지마다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30년째 상주 모동면에서 3천㎡ 규모의 포도 농사를 지어온 60대 A씨는 익지 않은 포도 송이를 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그는 수확 전 밭 전체를 일괄 매입하기로 했던 유통 상인으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A씨는 "색이 안 올라오니 상인들도 손해를 본다며 계약금을 돌려달라고 하더라"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런 식이니 인건비는커녕 약값도 못 건질 판"이라고 말했다.
현장의 포도 알을 갈라보면 당도는 기준치에 근접하지만, 껍질의 안토시아닌 합성이 멈춘 상태다. 포도는 늦여름 야간 기온이 15~20°C 사이로 떨어져야 색이 짙어지는데, 올해는 밤마다 25°C를 웃도는 열대야가 보름 넘게 이어졌다. 나무가 뜨거운 밤 기온을 견디기 위해 낮 동안 축적한 탄수화물을 호흡으로 모두 소비하면서, 정작 열매를 검게 물들일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다.
농가들은 물을 뿌려 온도를 낮추는 등 고육지책을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인근 농장의 한 주민은 "밤새 스프링클러를 돌리고 착색제까지 쳐봤지만, 달궈진 땅 기온을 낮추기엔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상주 농협 공판장 등지에서는 붉은 빛이 도는 포도들이 '특' 등급을 받지 못하고 하급품으로 분류되거나, 아예 경매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김인수 상주시농업기술센터 기술보급과장은 "여름 동안의 높은 밤 기온 때문에 증가한 호흡으로 인한 탄수화물의 과소비로 안토시아닌의 생성이 부족해지고 껍질의 색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다"며 "야간에 스프링클러를 작동하여 기온을 낮추고 칼슘제 등 영양소를 공급하면 색이 진해지는 효과를 볼 수 있으나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기후 위기가 농촌의 수확 공식을 바꾸면서, 일 년 농사의 결실을 기대하던 상주 농민들의 추석 대목은 실망과 걱정으로 뒤바뀌고 있다.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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