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경주 APEC
이재윤 논설위원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였다. 종교개혁의 신호탄이자 중세의 종말, 근세의 시작을 알린 일대 사건이었다. 오늘이 그날이다. 종교개혁 기념일이다. 508년이 흐른 10월 31일, 대한민국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가 개막한다. 공교롭다. 경주APEC은 단순한 외교행사가 아니다. 지난 30년간 세계질서를 이끈 '자유무역'이 살아남느냐, 사망선고를 받느냐를 가늠할 시험대다. 종교개혁이나 경주APEC이나 다 한 시대의 분기점이다. 공교롭다고 한 이유다. 구질서의 끝은 신질서의 시작과 맞닿아 있다. 중세와 근세를 가른 '95개 논제'에 버금가는 'APEC 경주 선언'의 탄생을 기다린다. '경주 선언'이 나온다면 핵심 가치는 '자유무역'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운을 뗐다. APEC CEO 서밋 연설에서 "대한민국은 위기에 맞서 다자주의적 협력의 길을 선도할 것"이라 했다.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우선주의 광풍에 맞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관세 포탄 앞에 세계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메인스트림을 거스르는 건 용감해 보이나 위험하다. 이 대통령은 '혼문의 완성'을 주창했다. 혼문(魂門).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아이돌과 팬들이 연대해 완성하는 영혼의 문이다. 보호무역주의에 맞선 강력한 협력을 제안한 것이다. 쉽지 않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경주 선언에)미국과 나머지 나라들 사이 이견이 있다"고 했다. 자유무역주의를 온전히 회복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APEC 참여국과 글로벌 CEO들이 세계의 단절을 완화할 연대의 의지를 쌓아간다면 언젠가 '혼문'을 완성하게 될지 모른다. APEC은 자유무역의 토대 위에 출범했다. 그 존재 이유를 다시 증명하는 시발점이 경주APEC이라면, 10월 31일은 또 하나의 역사적 기록을 추가하게 된다.
500년 후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 종교개혁가들의 슬로건은 지금도 공감을 준다. 교회의 개혁이 멈췄다. 교회는 더 이상 개혁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아집과 독단, 타락과 부패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바벨'은 히브리어로 '혼돈'을 뜻한다. 다시 혼돈에 빠진 교회. 배타성 강한 파시즘적 정치집단과 조우한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 때문에 전체 교회가 조롱의 대상이 됐다. 8할은 교회 지도자 탓이다. 이들이 수많은 젊은이들을 거짓 정보와 이념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자신의 죄를 저들은 알지 못한다. 미국과 유럽, 한국에서 도드라지지만 세계사적 조류로 확산 중이다. 한 시대 또 하나의 분기점이 머지않았음을 예고하는 징조다. 그게 종교에 의해서라는 게 500년 전과 닮았다. 이 또한 공교롭다.
이재명 정부의 개혁
종교개혁가들의 모토는 정치에도 통한다. 개혁적 정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개혁이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개혁 정부일수록 부단히 개혁하고, 항상 개혁돼야 한다. 이재명 정부를 향한 메시지다. 개혁을 멈추면 정권의 명은 다하고 결국 개혁 대상으로 전락한다. 10월 31일. 오늘로 이재명 정부 출범 150일째다. 다사다난, 내우외환, 우여곡절로 압축된 시간이었다. 개혁 5개월 즈음 꼭 할 것, 하되 신중할 것, 하면 절대 안 되는 것을 분별해야 한다. 기준은 중도 민심이다. '중도'는 좌도, 우도, 중간도 아니다. 시시비비의 명심(明心)이다.
이재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