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 중장년층들이 다른 지역보다 더 팍팍한 삶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티이미지뱅크>
"공감을 넘어 내 현실은 드라마 속 김부장 보다 못할 것만 같아 절망했다. 김부장은 서울에 자가라도 있어 사업이든 뭐든 뭐라도 해보기라도 하지, 노후 준비라는 말 자체가 거창하게 와닿는다."
#1. 대구에서 영천으로 출퇴근하는 18년차 직장인 A(48)씨는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속 김부장이 머지 않은 미래의 자신같다고 했다. 드라마는 주인공 김낙수가 희망퇴직과 재취업, 노후 준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렸다. 자동차 대기업 회사 1차 협력사에서 일하는 A씨는 "올해 회사가 많이 어려워 월급도 수차례 지연됐고 지난달엔 10명이 퇴사했다. 올해만 80여명이 자발적으로 퇴사했다"며 "너도 나도 드라마 속 김부장이 되지 않으려고 조기 퇴사하거나 떠밀리듯 희망퇴직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엔 퇴사자가 많아 내년부터 월급 5%를 올려 준다는 통보를 받았다.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퇴사 고민은 계속 할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2. 15년 넘게 대기업에 다니는 B(50)씨는 몇 달 전 회사가 희망퇴직자를 접수하자 고민에 빠졌다. 퇴직금은 5억원. 미성년 자녀가 있어 학자금 명목으로 6천만원이 추가됐다. 희망퇴직 대상은 만 50세 이상이거나 근속 15년 이상 직원들이다. B씨는 그 조건에 맞았지만 퇴직은 보류였다. 외벌이 가정이란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중학생 자녀를 둔 상황에서 5억원은 큰 돈이지만, 그 돈만으로 새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구조조정 얘기가 나와도 '나갈 지, 남을 지'를 놓고 저울질할 여유라도 있는 B씨 상황은 그나마 좀 나았다. 지역 중소기업 직원들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퇴직금이 몇 백만원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고없이 퇴직권고가 내려오는 일도 적잖다. 준비할 시간도, 선택지도 없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의 한 장면. JTBC 유튜브 캡처
◆드라마 보다 더 가혹한 현실 살아가
대구에 사는 '김부장'들은 드라마 속 '김부장' 보다 훨씬 고달픈 삶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북지방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기준 대구 자산·부채·소득·연금현황 자료를 보면, 김부장 연령대인 중장년층(40~64세)은 대출, 주택 소유, 근로 및 사업소득 등은 대부분 지표에서 전국 평균보다 낮았다.
2022년말 기준 대구 중장년층 96만2천명 중 55.3%(53만2천명)는 대출을 갖고 있다. 대구 전체 '대출있음' 비율 43.6%보다 11.7%포인트 높다. 전국 전체 '대출있음' 비율 45.8% 보다도 훨씬 높다. 대출잔액 구간을 보면 1억~2억원 구간이 18%로 가장 많았고, 3억원 이상은 12.5%였다.
대구 대출잔액 1억원 이상 비중은 35.1%로 전국 평균(33.7%)보다 1.4%포인트 높았다. 대구 중장년층의 1억원 이상 비중은 39.4%로 노년층(29.8%)·청년층(28.8%)을 크게 앞질렀다.
주택 소유 측면에선 대구 중장년가구의 64%가 주택을 갖고 있어 전국 중장년가구(63.1%)보다 0.9%포인트 높다. 하지만 주택 2채 이상 보유 비중(26.3%)은 전국 평균(27.1%)에 못 미쳤다. 주택자산가액 3억원 이상 비중도 전국 평균(35.3%)보다 10.5%포인트나 낮았다.
드라마 속 '서울 자가'와 천양지차인 '대구 자가' 금액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자가'라도 수십억을 호가하는 '서울 자가 사는' 대기업 김부장의 삶이 환상 속 이야기처럼 느껴질 터.
올해 대구지역 내 역세권·학군 외 아파트 가격이 보합은커녕 떨어지는 것도 허탈함을 더한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대구 아파트값은 올들어 2.3% 하락하며 1.95% 오른 서울과는 온도차가 컸다. 대구 아파트 가격은 광역시 중에서도 낙폭이 가장 컸다.
소득에서도 대구 중장년층의 '소득있음' 비율은 76.2%로 전국의 중장년층 '소득있음' 비율 78.9% 보다 낮았다. 소득 구간별로 보면 1천만원 미만, 1천만~3천만원 구간을 제외하고 3천만원부터 1억원 이상 전 구간에서 모두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
대구 중장년 절반 이상이 대출을 갖고 있고 주택은 있지만 여유는 없는, 드라마보다 더 가혹한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드라마 속 김부장에게 연민을 느끼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어느 새 동경의 대상으로 바뀌고 만다.
대구엔 대기업에 다니는 김부장 보다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김부장들이 대다수다. 대구에 다른 지역보다 대기업이 많지 않아서다.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KOSIS)의 사업체노동실태현황 분석 결과, 2023년 기준 지역별 전체 종사자 수 대비 300~1천명 이상 규모 산업체 종사자 수 비율을 보면 전국 8대 특·광역시 중 대구(11%)가 가장 낮다. 서울(27.4%)이 가장 높았고 이어 울산(26%), 대전(20%), 인천(15.9%), 광주(14.9%), 세종(13.7%), 부산(12.3%) 순이었다.
대구지역 전체 종사자 수는 74만3천235명으로, 이 중 10~29명 규모 산업체 종사자 수(16만3천389명)가 가장 많았다. 이어 1~4명규모 (14만6천503명), 5~9명 규모(12만6천4명)가 뒤를 이었다. 300~1천명 이상 규모 산업체 종사자 수는 8만3천230명이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의 한 장면. JTBC 유튜브 캡처
◆중장년층 고용 불안 해소 모색 필요
드라마 속 김부장은 떠밀리듯 퇴직한 후 생계를 위해 새 일을 찾아 나선다. 중장년층의 현실은 최근 논의되는 정년 연장(60→65세) 정책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지 되짚어보게 한다. 전문가들은 중장년층만을 위한 정년 연장 정책 도입도 쉽지 않은 문제라며, 실질적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북대 허문구 교수(경영학과)는 "중장년층 고용은 청년층 고용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중장년층의 고용 연장 또는 보장을 위해선 청년층 실업 문제부터 고민해야 한다. 기업의 부담을 완화하거나 고용여력 증대 방안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중장년층 고용 불안 해소 및 대구 지역 내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재교육이 동반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계명대 신진교 교수(경영학과)는 "대구 산업 구조가 과거 섬유·기계·차부품 중심에서 산업용 로봇·의료기기·모빌리티 등 신산업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중장년층의 경력과 교육은 여전히 과거 산업에 머물러 있다. 신산업에서 요구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구조"라고 짚었다.
이어 "기존 경력을 살리면서도 성장 가능성이 있는 분야로 이동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가령 섬유 분야는 기능성 소재, 품질 검사, 유통 쪽으로, 기계·차부품 분야는 기술 영업, 안전관리, 품질관리 등으로 전환할 수 있다. 중장년층이 경력을 활용한 온라인 기반 창업을 시도하거나, 현재 일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병행 전략도 가능하다. 핵심은 신산업 흐름에 맞춰 능력과 경력을 재정비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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