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에서 미디어아트展 ‘분황사 빛의 사자후’
예술가와 사찰 손잡고 빚어낸 미디어아트展 눈길
‘창, BEYOND’·대구 ‘021갤러리’ 기획·제작
역사·불교·미술 융합 미디어아트 경주 새 명물로
지난 1일 밤, 경북 경주 분황사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분황사 빛의 사자후'가 진행 중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천년의 세월을 품은 경북 경주 분황사. 어둠이 내려앉은 사찰의 정적을 깨고 현대예술의 찬란한 빛이 사찰의 터줏대감인 모전석탑의 표면으로 내려앉았다.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 창건한 경주 분황사 경내와 그 중심부의 석탑이 거대한 캔버스로 변신해 1천400년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석탑의 거친 질감과 매끄러운 빛의 물성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빚어낸 광경은 마치 석탑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초현실적 광경을 연출했다.
지난해 12월31일과 새해 첫날인 지난 1일 밤, 경북 경주 분황사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분황사 빛의 사자후'가 열렸다. 이번 전시의 화두는 '회복'과 '성찰'이다.
◆ 1천400년의 시간을 거슬러…빛으로 깨어난 석탑
지난 1일 밤, 경북 경주 분황사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분황사 빛의 사자후'가 진행 중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지난 1일 밤, 경북 경주 분황사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분황사 빛의 사자후'가 진행 중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이번 전시는 자극적인 미디어아트의 홍수 속에서 문화유산이 지닌 고유의 맥락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전시의 연출은 경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류재하 명예교수를 주축으로 강윤정, 김영범, 정세빈과 기술 지원을 담당한 유한택 등으로 구성된 미디어아트 연구 그룹 '창, BEYOND'이 맡았다.
이날 분황사 경내와 모전석탑 위로 류 명예교수의 작품인 '시간의 춤' 속 형상 및 부처님의 모습 등 다양한 동적 이미지가 투사됐다. 법고 소리를 배경으로 돌 속에서 고대의 인물이 걸어 나와 춤을 추듯 역동적 움직임을 보이거나, 다시 돌로 돌아가는 듯한 초현실적 장면들이 연출됐다. 마치 움직이는 추상미술 같은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소영씨(021갤러리 대표)는 "과도한 연출은 최대한 배제하고, 분황사가 품은 시간의 흔적을 현대적 기술로 조심스레 어루만지려 했다"며 "현대 예술과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새로운 회복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지난 1일 밤, 경북 경주 분황사에서 미디어아트 전시 '분황사 빛의 사자후'가 진행 중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분황사는 우리 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향기가 서린 곳이다. 전시의 중심에 선 모전석탑은 불국사나 황룡사 9층 목탑보다 앞선 시기에 축조된 신라 석탑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는다. 분황사와 '창, BEYOND'는 향후 미디어아트 전시의 완성도를 더 높여 분황사라는 장소의 역사적 맥락을 살린 해당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재현할 계획이다.
◆분황사, 경주의 새로운 명소를 꿈꾸다
류재하 경북대 미술학과 명예교수가 '분황사 빛의 사자후' 전시의 연출 의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이번 전시는 지자체의 예산 지원 없이 예술가들의 자발적 참여와 사찰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연출을 맡은 '창, BEYOND'에 따르면 예술적 자존심을 걸고 순수미술의 진정성을 빛으로 구현해냈다.
류 명예교수는 "기존 미디어 아트 행사들이 거액의 예산을 투입하고도 예술적 질이 아쉬운 경우가 많았다. 순수 미술가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에서 벗어나 명예를 회복하고 제대로 된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주지 스님께 '장소' 협조를 요청했고, 스님께서도 흔쾌히 동의해 주셔서 이번 전시가 성사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미디어아트 '분황사 빛의 사자후'가 열리는 분황사 주지 성제 스님.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분황사 주지 성제 스님은 "모두가 만족할 만한 완성도를 갖출 때까지 '창, BEYOND'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날씨가 풀리는 오는 3~4월경에는 30m 상공까지 규모를 확장해 미디어아트를 선보일 계획이며, 여기에 원효 스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석가모니의 삶을 8개 장면으로 나눠 그린 불화)와 무애가(원효 스님이 지었다고 알려진 불교 가요) 등 불교적 스토리를 입혀 경주의 떠오르는 명소로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소영씨는 "상업적 목적 없이 예술의 진정성만으로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싶었다"며 "값비싼 장비와 인력이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좋은 예술'을 대중과 나누겠다는 예술가들의 의지와 불교계의 도움 덕분"이라고 밝혔다.
역사적 장소의 맥락을 읽어내고 그 위에 예술의 숨결을 불어넣은 '분황사 빛의 사자후'를 통해 분황사가 이제 과거를 기억하는 곳을 넘어, 현대예술과 소통하는 새로운 '회복의 공간'으로 거듭날지 관심이 쏠린다.
한편 '창, BEYOND'는 특정 장소의 맥락을 읽어내고 그에 맞는 기술과 예술을 접목하는 '랩(Lab)' 성격의 프로젝트 팀이다. 이들은 이번 분황사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소멸한 유적이나 문화재를 미디어 아트로 복원하는 작업을 확장해 나갈 예정이다.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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