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 기술보증기금 고객부장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원천기술보다 생산기술에 치중해 왔다. 그래서 "장기 성장동력이 약하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세계가 한국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도, 역설적으로 그 '폭넓은 생산기술의 집적' 때문이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 공급망 블록화, 탄소중립과 디지털 전환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세계 기업들은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나라'를 다시 찾고 있다. 한국은 품질과 납기, 대량생산과 빠른 전환 능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를 대체할 선택지는 많지 않다. 그래서 "제조강국 대한민국, 하늘이 준 기회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다만 이 기회를 '선물'로만 받아들이면 위험하다. 하늘이 문을 열어준 것은 맞지만, 문턱을 넘는 건 우리의 몫이다.
지금의 제조강국은 우연이 아니다. 중화학공업 육성과 산업단지 중심 인프라 투자로 뿌리를 내리고, 반도체·자동차 분야의 선제적 기술투자로 기반을 다졌다. 위기마다 선택과 집중으로 실기하지 않았고 끈질긴 품질혁신과 생산성 향상이 층층히 쌓여 오늘의 경쟁력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촘촘히 연결된 공급망이 있었다.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을 열면 중소기업은 공정기술과 부품 경쟁력을 축적하여 함께 성장했다. 물론 그 과정은 부의 편중, 지역격차 심화, 일부 계층의 희생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제는 그 성과가 '탄탄한 생태계'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냉정하게 점검해야 할 때다. 이 기회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 이 경쟁력이 3년 이상 '그대로' 유지되기는 쉽지 않다. 후발국의 추격은 빨라지고 주요국은 자국 생산과 현지화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 경쟁력이 '자동 연장'될 것이라는 착각이 시작되는 순간 기회는 증발한다. 결국 남는 과제는 하나다. 우리가 일궈낸 가치를 다음 성장동력으로 전환하려면, 제조업의 구조혁신이 필요하다.
첫째, 제조에 디지털 전환의 새 옷을 입혀 '구조'를 바꿔야 한다. 스마트공장은 장비를 들이는 일이 아니라 데이터가 흐르는 방식,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공정에서 쌓이는 데이터와 품질 알고리즘, 설비 운영 노하우를 소프트웨어·서비스·플랫폼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부가가치는 밖으로 빠져나간다. '만드는 힘'을 '팔리는 지능'으로 바꾸는 전환이 핵심이다.
둘째, 대기업과 중소기업 협업의 문법을 다시 써야 한다. 단가 중심의 수직관계로는 혁신이 퍼지지 않는다. 공동 R&D, 데이터 기반 공정혁신, 글로벌 동반진출을 '표준 계약'처럼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은 표준과 시장 정보를 공유하고, 중소기업은 특화기술로 공급망을 고도화하는 구조, 이것이 초격차의 실제 엔진이다.
셋째, 제조강국 전략은 지역균형발전과 결합될 때 지속가능해진다. 수도권 집중이 심화될수록 인재·주거·비용의 병목은 커진다. 지역별 특화산업을 명확히 세우고, 산학연 협력과 금융, 인력양성을 묶어 '다핵형 제조벨트'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 대학이 혁신 허브가 되고, 청년이 지역에서 일하고 창업하며 정주할 수 있어야 제조 생태계의 수명이 길어진다.
결국 지금은 제조강국의 결산이 아니라 재투자의 시간이다.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니라 준비된 국가에게 주어진 기회다. 우리는 이 3년을 '생산기술의 나라'를 치장하는 데 쓸 것인가, 아니면 기술과 데이터, 협업과 지역 생태계로 바꿔 다음 30년의 성장동력을 설계할 것인가. 오늘의 기회가 진짜 하늘이 준 것이라면, 내일의 성과는 우리가 만든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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