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경 한동대 교수
"아기 대신 벤츠를 사고 있다면, 벤츠를 팔고 아기를 품으라." 60년 넘게 한국을 연구해온 마크 피터슨 교수의 이 비유는, 우리가 어떤 가치를 붙들고 달려왔는지를 비춘다. 그는 한국의 힘을 먼저 인정한다. 위기 앞에서 하나가 되는 결속력, 문제를 해결하는 추진력, 그리고 사람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정. 한국의 압축성장은 이런 문화가 빚어낸 성취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그는 경고한다. '목욕물을 버리다가 아기까지 버리는' 실수를 하지 말라고.
버려야 할 목욕물은 분명하다. 과잉 경쟁과 비교 의식, 성취 중심의 평가처럼 우리가 피로해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를 붙든다면 삶의 방향도 계속 왜곡될 수밖에 없다. 지켜야 할 아기는 더욱 분명하다. 관계를 책임지는 윤리,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성, 사람을 성과가 아닌 존재로 보는 가치관, 그 바탕에 깔린 따뜻한 정.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 구분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쌀 한 톨이 귀하던 사회가 이제는 '잘나감'을 증명하려 더 비싼 것을 앞세운다. 한강의 기적은 축복이었다. 하지만 과욕과 허영이 따랐고, 공허가 도처에 가득해졌다. '다정했던 좋은 삶'이 '자랑하고픈 비싼 삶'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는 피터슨 교수가 감탄했던 '정'을 잃는다. 이웃과 나누던 온기, 어려울 때 기대던 신뢰, 함께 살아간다는 감각 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벤츠가 가장 확실한 증명이 되었을까.
세계행복보고서(World Happiness Report) 2025에서 한국은 147개국 중 58위였다. 더 뼈아픈 대목은 사회적 지지와 삶의 선택 자유가 여전히 낮다는 점이다. 경제가 성장해도 관계가 얇아지고 스스로 삶을 고를 수 있다는 감각이 약해지면 행복은 후퇴한다. 퓨리서치의 조사에서도 17개 선진국 중에서 한국은 삶의 의미 1순위로 '물질적 풍요'를 꼽은 유일한 나라였다. 벤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벤츠가 '내 인생 증명서'가 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성취의 표면이 번쩍일수록 마음의 바닥은 더 꺼진다.
피터슨 교수가 경고했듯이 우리는 이미 많은 '아기들'을 잃고 있다. 청년들은 관계보다 스펙 쌓기에, 부모들은 돌봄보다 사교육비에, 직장인들은 신뢰보다 성과 증명에 매달린다. 눈을 맞추며 더불어 사는 일상은 사라지고, 사회적 신뢰는 흔들린다. 비싼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슴은 텅 빈다. 수십 년에 걸친 행복 연구들이 반복해 확인한 것도 같은 지점이다. 물질은 일정 수준을 넘는 순간, 더 이상 삶의 만족을 크게 더하지 못한다.
이제 각자의 '사람학교'를 돌아보자. 더 빨리 달리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어디로 달려야 하는지를 묻는 교육, 더 많이 갖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는 교육, 그리고 목욕물은 과감히 버리되 아기만큼은 끝까지 지키는 교육. 이러한 결단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
벤츠를 팔라는 말의 본질은 금욕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속도를 내고 무엇을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낼지를 살피라는 부탁이다. 가족과 산책하는 30분, 친구의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공동체의 누군가를 돌보는 작은 수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길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선택에서 시작된다. 한 개인의 선택이 겹겹이 쌓이면 한 나라의 미래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지향할 부국은 '부자 나라'가 아니라 '가슴이 웅장한 나라'다. 벤츠가 아니라 잃어버린 아기를 다시 품을 때, 대한민국의 미래도 웅장해질 것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