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 인천~개성 1박2일 도보이동
피난민에 호떡 팔고 언니집 곁살이
대구가톨릭대 약대 김조자 졸업생
한푼두푼 저축한 5억 후학에 기부
“필요한 만큼만 쓰고 나눌 때 의미
90세 돼도 새로운 무언가 배울 것”
대구지역 후학을 위해 5억원의 장학금을 기부한 주부 김조자씨가 전쟁통 궁핍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며 웃고 있다. /김은경 기자
대구지역 후학을 위해 5억원의 장학금을 기부한 주부 김조자씨가 전쟁통 궁핍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며 웃고 있다. /김은경 기자
"하루는 동네 허허벌판을 돌아다니다가 동백꽃인지 예쁜 꽃송이가 보여 그 꽃을 줍느라 가마니 위로 올라갔어요. 그런데 화장실 위를 덮고 있던 가마니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그대로 똥통에 빠지고 말았죠. 울면서 집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멀고 부끄럽던지…."(웃음)
주부 김조자씨는 어려서부터 소문난 '호기심쟁이'였다. 1941년 일본 나고야의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즉각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 덕에 똥통에도 빠지고, 요강의 물을 흠뻑 뒤집어 쓰기도 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남들보다 굶주리고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지만 그것조차 행복"이라는 김씨는 살림살이를 하면서 한푼두푼 저축한 돈을 대구지역 후학들에게 5억이 넘게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남편은 '니가 무슨 재벌이냐?'고 하지만 제 생각에 돈은 필요한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필요한 사람한테 나눠 요긴하게 쓸 때 더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나눔철학을 밝혔다.
◆인천서 개성까지 도보로 1박2일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왔다고 들었습니다.
"개성출신 부모님이 일본 나고야에서 만나 6남매 중 다섯째로 제가 태어났어요.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지만 한국전쟁 후 대구에서 오래 살았어요. 전쟁통에 부모님을 만나러 인천에서 개성까지 1박2일을 배타고 걸어서 갔던 일, 피난민 상대로 호떡장사에 나섰던 일, 어려운 집안형편 때문에 언니 집에서 곁살이를 했던 일 등이 주마등처럼 스치네요."
▶대구가톨릭대(구 효성여대) 약대 입학식에서 신입생 선서를 했었다고요?
"벌써 수십 년 전 일이네요.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아이들을 모두 학교에 보내기 어려웠는지 저를 간호고에 보내셨어요. 그 학교에 가면 3년 동안 학비도 없고, 기숙사에서 잠도 자고, 식사도 제공되었거든요. 그런데 자식교육에 열성이셨던 어머니는 후에 마음을 바꾸셨고, 저는 이 악물고 공부해 마침내 수석입학을 해 선서를 했지요. 그때는 수석을 해도 장학금이 없었어요."
▶전공을 살려 약사로 활동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특이하게도 단 하루도 약사로 근무한 적이 없었다고요?
"사실 대학 시절 교수님 한 분이 하신 말씀이 제 머리에 강하게 박혔어요. '골목마다 약국이 있어 품격이 떨어진다, 졸업하고 바로 약국 차릴 생각 말라'고 하셨거든요. 그 말씀 때문인지 약국에 대한 미련이 크지 않았어요. 대신 졸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했죠. 고학으로 자수성가한 남편이 돈을 잘 벌어다 주니 저는 세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어요. 그게 제 운명이었나 봐요."
▶약사는 아니지만 서점을 경영하신 적이 있으시죠?
"서울의 한 대학교 구내서점을 운영했던 저의 40대의 9년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돈이 없으면 외상을 주기도 하고, 서클활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찬조금도 줬죠. 그때 인연을 맺은 한 아이는 교수가 되어 인연을 이어오고 있죠. 그 시절에 읽고 싶은 책은 다 읽을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서점을 경영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자유로워졌어요."
◆60세에 시작한 가곡, 80세에 그림 전시회
▶예술 활동이 굉장히 활발한데, 가곡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64살에 가곡을 시작했어요. 남들은 늦었다고 할 때였죠. 하지만 저는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에요. 가곡 교실에서 배우는 걸로 부족해 선생님 댁에 가서 개인 지도를 몇 년씩 받았죠. 그렇게 부른 곡이 200곡이 넘어요. 전국 곳곳을 다니며 공연도 하고, 내 노래를 인터넷 사이트에 올리기도 했죠. 기록이 중요하니까요.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다 기록해 뒀더니 그게 나중에 자서전을 쓰는 밑거름이 되더라고요."
▶한국 가곡의 거목인 故 이수인 선생과 각별한 사이셨다고요?
"예술가곡을 공부하기 전에 알았던 '별' '고향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참 좋은 곡이라 감탄을 했죠. 2006년 우연히 강연회에서 뵜어요. 함께 음악회도 가고, 선생님의 고희연에서 공연도 했어요. 선생님의 모든 음악자료가 일관성 있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CD음원 출력 저장과 가사 삽입 후 유튜브 업로드 등의 작업을 했어요. 작곡가 이수인의 삶과 음악 사이트에 근 한 달 걸려 모든 자료를 올려놓은 일은 선생님을 위해 제가 드리는 최고의 예우일 것이에요."
▶영어공부에도 진심이라고 하더군요?
"젊을 때부터 영어를 참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죠. 영국 잼보리 대원들이 왔을 때 저희 집에서 2박 3일 민박을 하며 가이드 노릇도 했죠. 요즘은 AI 앵무새 영상을 봐요. 앵무새가 하는 영어 대화를 듣고 모르는 단어는 메모해서 찾아보죠. 뇌를 계속 쓰지 않으면 녹슬거든요. 그림을 그리다 힘들면 책을 읽고, 책 읽다 눈이 침침하면 다시 붓을 잡아요. 무언가에 집중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이 저를 젊게 만듭니다."
◆소중한 것 나눌 때 얻는 충만함
▶모교인 대구가톨릭대 약대에 거액을 기부하셨죠?
"처음에는 1억을 내고, 그다음 또 1억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덧 누적 기부액이 5억 원이 됐어요. 학교 측에서 제 이름을 딴 '김조자 기획전시실'과 '김조자 강의실'을 만들어줬죠. 학생들이 내 이름이 붙은 방에서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돈이라는 게 쥐고 있으면 나갈 데가 없지만, 좋은 곳에 흘려보내면 그 가치가 수만 배로 돌아오더라고요."
▶기부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남편분의 반대는 없었나요?
"처음에는 남편도 '무슨 재벌 흉내를 내냐'며 타박하기도 했죠. 하지만 제가 아끼고 모은 보험 만기금과 월세 수입으로 조용히 준비했어요. 나중에 기부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남편도 내심 기분 좋아하더라고요. 학교 입구에 제 이름이 딱 붙어 있는 걸 보니 본인도 자랑스러웠나 봐요. 우리 아이들에게도 미리 선언했어요. '엄마는 좋은 일에 다 쓰고 갈 테니 유산 기대하지 마라'고요. 아이들도 엄마의 이런 삶을 지지해 줍니다."
▶여사님처럼 나이 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자기 몸을 너무 귀하게만 여기지 말고 자꾸 움직여야 해요. 저는 집안 청소도 직접 하고, 시멘트 못도 망치로 직접 박아요. 몸이 적당히 피곤해야 잠도 잘 오는 법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주는 기쁨'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쓰고 남은 것이 아니라, 내게 소중한 것을 나누어 줄 때 느끼는 그 충만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어요. 저는 90세가 되어도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 또 나누며 살 겁니다. 그게 제 건강의 비결이자 인생의 목적이니까요."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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