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불신 설화와 등대 그리고 고래해상전망대가 이어주는 항구의 오래된 이야기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동해의 수평선이 가장 먼저 열리는 이 항구는 새벽 공기부터 다르다.파도는 방파제를 두드리고 갓 조업을 마친 어선들은 낮게 엔진음을 울리며 포구 안으로 스며든다. 그 길목에서 5초간격으로 녹색 불빛을 깜빡이며 배들을 맞는 이가 있다. 대진항 남방파제등대다.
경북도내 124개 1종 어항 중 하나로 197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영해 대진항은 반세기 넘게 지역 어민들의 삶을 떠받쳐왔다. 사진은 남방파제 등대.
1971년 국가어항으로 지정된 대진항은 반세기 넘게 지역 어민들의 삶을 떠받쳐왔다.2004년 처음 불을 밝힌 남방파제등대는 그 세월의 한가운데 서 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바다와 육지를 잇는 가장 확실한 좌표다.
등대의 뿌리는 뒤편 상대산 정상의 관어대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문장가 이색 선생이 이름 붙였다는 관어대는 '물고기를 굽어보는 자리'라는 뜻을 품고 있다.예부터 고래와 거대한 어군이 오가던 길목을 한눈에 읽어내던 천혜의 전망대였다. 높은 곳에서 물길을 읽던 선조들의 눈은 이제 방파제 끝 낮은 자리의 등대 불빛으로 이어진다.
관어대가 바다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이었다면 등대는 그 흐름을 건너온 배를 품는 '손'이다.옛 자료에는 대진항이 한때 동해안 포경의 거점이었다고 하며 그 당시 집채만 한 고래를 묶고 귀항하던 어선들에게 등대 불빛은 기쁨의 신호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2004년 처음 불을 밝힌 대진항 남방파제 등대가 최근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통해 주변이 새롭게 바뀌었다.
마을 회관 앞에서 만난 홍말선(92) 씨는 "예전엔 '등대'보다 '등대불'이라 불렀다. 저 불빛이 깜빡이면 배가 돌아온다는 뜻이었다"라고 말했다. 기다림과 안도의 시간은 등대 기둥에 스며 있다.이 항구에는 또 하나의 오래된 이야기가 전해진다.바다에서 건져 올린 황금빛 불상을 마을 수호신으로 모셨다는 '해불신(海佛神)' 설화다. 조선 시대로 추정되는 어느 날, 한 어부의 그물에 묵직한 물체가 걸려 올라왔다. 생선이 아니라 황금빛 불상이었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나타난 부처는 "나는 바다를 지키는 신이다. 나를 마을이 보이는 높은 곳에 모시면 풍랑을 잠재우고 만선을 주겠다"라고 일렀다고 한다.마을 사람들은 대진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작은 집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 이후 큰 풍랑 사고가 줄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대로 전해 내려온 설화는 20년 전쯤 마을에서 바다와 등대를 바라보는 곳에 작은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지금도 대진리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별신굿을 지낼 때 해불신을 함께 모신다.다른 어촌이 산신이나 토지신을 모시는 것과 달리 바다에서 직접 건져 올린 불상을 수호신으로 삼은 사례는 드물다.
대대로 전해 내려온 대진항의 해불신 설화에 따라 마을주민들이 20년 전쯤 바다와 등대를 내려다 보는 곳에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비석을 만들어 세웠다.
해불신 설화는 단순한 전설을 넘어, 바다 앞에 선 인간의 겸허함을 보여준다.풍랑과 싸워야 했던 시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에 의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날 어민들이 등대 불빛을 바라보는 마음도 다르지 않다. 눈앞에서 깜빡이는 초록빛은 과학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믿음의 대상이기도 하다.
지금 대진항의 새벽은 대게를 잡는 자망과 양식·장어 조업 어선 약 70여 척이 드나들고 있다.대진 2리 박서일 어촌계장(79)은 "GPS가 아무리 정확해도 마지막은 등대 불빛을 봐야 안심이 된다"라고 했다.또 "30년 전에는 바다 위에서 상대산과 칠보산 형제봉을 바라보며 그물 위치를 파악하고 조업했다"라며 회상했다.평생을 바다 위에서 살아온 그는 "GPS가 없던 시절에는 산과 등대의 불빛이 조업 장소의 기준이 됐다"라고 젊은 시절 당시의 바다 생활을 그리워했다.
마을 해녀 출신 황순남(78)씨 역시 "젊은 시절 물질하다 숨이 차 올라오면 등대와 마을을 보면서 내가 어디 있는지 알게 되는 기준"이라고 말했다.
해양 관광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해상전망대는 고래가 물을 뿜는 형상을 본떠 조성돼 영해 대진항의 상징이 됐다.
최근 대진항은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마치고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북방파제 보강과 부두 확충, 해상전망대 조성으로 어업 환경은 한층 안전해졌고 관광객의 발길도 많아졌다. 특히 고래해상전망대는 고래가 물을 뿜는 형상을 본떠 조성돼 항구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황 씨는 "수십 년 동안 평범했던 등대가 요즘은 주변에 알록달록한 조명이 더해져 마을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대진항 등대에서 해상 전망대로 이어진 스카이워크를 걸으면 바다 위에 서 있는 듯한 해방감을 느낄수 있고 등대 뒤쪽에는 상대산의 모습이 펼쳐진다.
영덕의 해양 관광 활성화를 위해 조성된 이 전망대는 "이 앞바다에 고래가 자주 출몰했다"는 이야기를 테마로 삼았다. 전망대의 하이라이트는 바다로 이어진 스카이워크 구간이다.
발아래로 파도가 부서지고 포말이 번지는 장면을 그대로 내려다보는 순간 방문객들은 짜릿한 스릴과 함께 바다 위에 서 있는 듯한 해방감을 느낀다. 전망대 끝에 서면 남쪽 축산항과 북쪽 고래불해수욕장까지 동해의 푸른 선이 시원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화려한 시설 너머에서 변하지 않는 풍경이 있다. 방파제 끝에서 묵묵히 빛을 발하는 등대다.관어대의 눈길이 머물던 자리, 고래의 길이 지나던 바다와 해불신을 모시며 풍어를 기원하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한 점으로 모인다.
'경북 동해안 등대 로드'가 비추는 것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시간과 신앙, 생업과 기억을 잇는 빛의 궤적이다. 오늘도 대진항 등대는 저녁만 되면 5초간격으로 깜빡이며 동해의 길목을 지킨다.
글·사진=남두백기자 dbnam@yeongnam.com
남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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