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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동해안 등대로드] ② 포항 호미곶 등대…세기를 견딘 하얀 거인, 힐링의 빛을 품다

2026-02-27 17:55

118년 묵묵히 바다 지킨 26.4m 붉은 벽돌의 위용
철근 없이 지어낸 신고전주의 건축미
대한제국 황실 상징 ‘오얏꽃’ 품은 자주적 빛
아시아 최초 국제항로표지협회(IALA) ‘올해의 등대’

정면에서 바라본 호미곶등대. <전준혁기자>

정면에서 바라본 호미곶등대. <전준혁기자>

한반도 가장 동쪽 끝 호미곶에 위치한 '호미곶등대'.


20일 매서운 동해의 바람을 뚫고 도착한 그곳에서 하얀색 옷을 입은 호미곶등대는 바다에 비치는 햇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위치한 해맞이 광장 상생의 손이 관광객으로 가득 차서였을까. 조용하고도 한산한 이곳에서 묵묵히 바다를 응시하는 등대의 모습은 외로우면서도 든든한 느낌을 자아냈다. 118년이라는 긴 역사 동안 수많은 태풍과 바람을 견뎌왔음에도 올곧이 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자태는 오래도록 발걸음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외부에서 바라본 호미곶등대는 하부에서 상부로 올라가면서 활처럼 날렵하게 휘어진 모습이었다. 포항 지진을 비롯해 동해의 거센 풍랑을 견뎌왔음에도 크랙(crack) 등 눈에 드러난 훼손의 흔적이 별로 없다는 점은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숭고함조차 느끼게 했다. 건축학적으로 호미곶등대는 다른 고층 건물과는 달리 기초부터 폭이 좁으며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하고 신고전주의 미학을 완벽하게 소화해 우리나라 등대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생의 손이 위치한 새천년광장에서 바라 본 호미곶등대. <전준혁기자>

상생의 손이 위치한 새천년광장에서 바라 본 호미곶등대. <전준혁기자>

이 거대한 빛의 성채가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는 등대원의 낡은 일기장 속에서도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1970년대 호미곶등대에서 근무했던 고(故) 정순종 등대장이 남긴 회고록에는 당시의 급박했던 바다의 민낯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는 일기에서 대보항 방파제 쪽을 바라보니 커다란 파도가 산더미처럼 밀려 방파제 끝을 때리며 비말이 날아가고, 조난당한 7~8천t 규모의 화물선이 해안선에서 불과 300m밖에 안 되는 곳에 좌초돼 떠밀려오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바다가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며 포효할 때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등대가 뿜어내는 강렬한 불빛은 풍랑에 생을 맡긴 사람들에게 '돌아갈 길'이자 '살아야 한다'는 약속이었다.


호미곶등대가 동해의 험난한 파도를 굽어보며 불을 밝히기 시작한 것은 1908년 12월 20일의 일이다. 이 등대의 탄생 이면에는 대한제국의 뼈아픈 수난사와 굳건한 자존심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대한제국 광무 5년인 1901년에 일본 선박이 대보리 앞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한 사건은 등대 건립을 재촉하는 뼈아픈 계기가 됐다. 당시 일본은 자국 선박의 안전을 명분으로 등대 설치를 강하게 압박했지만, 호미곶등대는 단순히 외세 강요에 의해서만 굴욕적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부산항과 원산항 개항 이후 해상교통량이 늘어나면서 연안 표지로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됐고, 대한제국 정부의 주도하에 치밀한 부설 준비가 이뤄졌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아 1908년에 26.4m 높이의 팔각형 탑 형식으로 준공된 이 등대는 건립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안용훈 국립등대박물관 기획운영팀장. <전준혁 기자>

안용훈 국립등대박물관 기획운영팀장. <전준혁 기자>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진 풍파를 이겨낸 비결은 무엇일까. 취재 현장에서 만난 안용훈 국립등대박물관 기획운영팀장은 호미곶등대가 지닌 독보적인 건축사적 가치를 강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는 "26m가 넘는 크기로 만들어졌는데 철근을 하나도 안 썼으며 조적식으로 지어졌다"며 "위에 콘크리트하고 회반죽을 발라놨는데 1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진짜 태풍에도 전혀 문제없이 튼튼하다"고 역설했다. 단순한 벽돌 구조물이 어떻게 그토록 흔들림 없이 견고할 수 있는지, 당시의 첨단 건축 기술과 세밀한 조적 방식이 결합된 위대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것은 철근 없는 붉은 벽돌이 품고 있는 내면의 풍경이다. 안 팀장은 "등대 내부에 오얏꽃 무늬가 들어 있어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자료"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호미곶등대 내부 6층으로 이루어진 각 층의 천장에는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모양의 문양이 선명하게 조각돼 있다. 일본의 노골적인 야욕과 군사적 억압 속에서도 등대에 오얏꽃을 정성스레 새겨 넣은 것은 이곳이 엄연한 대한제국의 영토이며, 황실의 굳건한 자산임을 만천하에 소리 없이 웅변하는 고귀하고 자주적인 정책의 일환이었다. 망국의 슬픔이 짙게 드리우던 어두운 시대, 한반도 가장 동쪽 끝자락에서 불을 밝힌 호미곶등대는 캄캄한 밤바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어두운 운명 앞에서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내고자 했던 눈물겨운 저항의 산물인 셈이다.


바다에서 바라 본 호미곶등대. <전준혁기자>

바다에서 바라 본 호미곶등대. <전준혁기자>

뛰어난 미학적 완성도와 흔들림 없는 구조적 안정성, 그리고 뼈아픈 역사를 당당히 딛고 일어선 대한제국 등대로서의 굳건한 정체성을 두루 인정받아 호미곶등대는 최근 국제적인 찬사를 거머쥐었다. 2022년 국제항로표지협회(IALA)로부터 전 세계에서 네 번째이자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올해의 등대(세계등대유산)'로 선정되는 눈부신 쾌거를 이룬 것이다. 전 세계가 그 숭고한 가치를 깊이 인정한 이 등대는 1908년 설치된 이후 현재까지도 묵묵히 본연의 기능을 흔들림 없이 수행하며 동해안의 항로표지로 굳건히 서 있다. 내부에 설치된 굽이치는 높은 철제 계단은 여전히 비교적 보존이 잘돼 있어 현재까지도 이용되고 있으며, 건립 당시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바다와 함께 호흡해 온 등대 역할은 정보통신 기술의 눈부신 발달과 함께 조금씩 그 궤적을 달리하고 있다. 사람의 체온으로 렌즈를 정성껏 닦고 불을 지피며 상주하던 등대원들의 아날로그적 온기는 서서히 줄어들고, 첨단 시스템이 오차 없이 빛을 통제하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등대가 캄캄한 바다와 사람을 단단히 이어주는 마음의 닻이라는 본질적인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요즘 시대 항로 표지로서의 기능보다는 등대를 직접 바라보고 힐링하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거칠고 매서운 파도를 향해 쏘아 올리던 치열한 생존의 빛은 이제 팍팍하고 지친 현대인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따뜻한 위로와 낭만으로 아름답게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한 관람객은 "해맞이 광장 상생의 손을 보러 왔다가 햐얗게 솟은 등대가 눈에 들어와 방문했다"며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놀랐고 역사가 오래됐다는 사실도 대단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오늘 밤에도 칠흑 같은 바다를 향해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호미곶등대의 백색 섬광은 누군가에게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응원일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몰아치는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라는 따뜻한 위안의 메시지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핍박과 6.25 전쟁의 상흔, 그리고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몰아친 거센 동해의 폭풍우를 온몸으로 묵묵히 이겨내고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에 118년의 묵직한 기억을 새겨 넣은 호미곶등대. 세기를 견딘 이 하얀 거인은 오늘도 어김없이 포항의 푸른 바다 위로 변치 않는 찬란한 희망의 빛을 힘차게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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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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