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 기술보증기금 고객부장
오랫동안 한국 동계올림픽의 금메달은 숏트트랙이 사실상 독점해 왔다. 그러나 지난 겨울, 하프파이프에서 금메달을 따낸 최가온 선수의 등장은 그 익숙한 지형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잘하는 것을 반복하는 단계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전환점에 서 있다. 경기를 보며 눈에 들어온 것은 선수의 기량만이 아니었다. 그가 타고 있던 스노보드였다. 세계 정상급 선수가 사용하는 장비는 단순한 스포츠용품이 아니다. 그 뒤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기술혁신이 숨어 있다.
오늘날 세계 스노보드 산업을 대표하는 버튼(Burton)의 시작은 이를 잘 보여준다. 창업자인 제이크 버튼 카펜터는 거대한 자본을 가진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스노보드를 누구보다 좋아했고, 누구보다 오래 눈 위에 머물렀던 사람이었다. 당시 스노보드는 장난감에 가까운 수준이었고, 그는 그 불편을 몸으로 겪었다. 남들이 취미로 즐길 때 그는 문제를 발견했다.
그는 결국 직접 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만들고, 타보고, 넘어지고, 다시 설계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 집요한 실험은 결국 세계적인 브랜드를 탄생시켰고, 오늘날 선수들이 사용하는 장비의 표준을 만들었다. 혁신은 거창한 전략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다는 집념이 출발점이었다.
이 사례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창업은 거대한 자본이나 특별한 기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발견한 불편, 그리고 그것을 직접 해결해 보겠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좋아하는 일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가장 깊은 관찰과 통찰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정작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는 과정에 익숙하지 않다. 일을 즐기는 문화가 약한 것은 물론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묻는 경험도 부족하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는 교육과 경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에 몰입하는지조차 모른 채 직업을 선택한다. 좋아하는 일을 모른다면 그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혁신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줄어든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창업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창업을 '특별한 사람의 선택'으로 여긴다. 그러나 창업은 큰 자본이나 특별한 기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불편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는 과정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안정적인 경로를 선호하는 문화와 실패에 대한 부담은 창업을 도전보다 위험한 선택으로 만들고 있다.
기술혁신의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산업은 대부분 현장의 문제를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서 시작됐다. 불편을 가장 먼저 느낀 사람이 새로운 해결 방법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창업으로 이어지며 산업을 바꾸어 왔다.
이 점은 AI 시대에도 다르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인공지능을 얼마나 빨리 도입하느냐가 아니다. 누가 문제를 정의하고, 누가 기술을 설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다루는 설계권이 소수 플랫폼 기업에만 집중되면 우리는 기술을 소비하는 데 머물 뿐이다. 반대로 현장의 불편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에 나설 때 새로운 창업의 기회도 열린다.
기술혁신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대개는 하나의 질문에서 출발했다.
"왜 아직 아무도 이것을 바꾸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기술이 아니라 더 많은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창업으로 연결하는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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