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농협 외길…지역 농업·금융 잇는 현장형 리더
“파쇄된 어음 조각 맞추고, 교도소까지 달려갔죠”
“퇴직 후엔 셔플댄스 추고, 문학 소녀로 돌아갈 것”
NH농협 정창미 영덕군 지부장(왼쪽)이 군지부 1층에 위치한 농협은행에서 직원들과 함께 금융사업 등을 의논하고 있다.
보수적인 금융계, 그중에서도 농촌 지역의 농협 조직에서 여성으로서 '유리천장'을 깨고 지부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NH농협 영덕군지부의 사상 첫 여성 지부장으로 부임해 2025년 전국 업적평가 1등급(전국 38개소 중 1위)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둔 주인공이 있다.
영덕의 농업과 금융을 책임지고 있는 그를 만나 37년 농협 인생과 그 속에 담긴 뜨거운 진심을 들어보았다. NH농협은행 영덕군지부 정창미 지부장은 스스로를 "현장에서 고객과 함께 성장한 농협맨"이라고 소개한다.
1989년 농협에 입사해 37년 가까이 금융 현장을 지켜온 그는 "고객과의 신뢰야말로 농협 직원에게 가장 큰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경주시 안강읍 출신인 정 지부장은 안강여중·안강여고를 졸업한 뒤 경주전문대와 위덕대 경영학과를 마쳤다. 넉넉지 않은 농촌 환경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농사일을 도왔다.
"모내기부터 소풀베기까지 안 해본 농사일이 없었어요. 그런 경험 덕분에 농업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의 농협 생활 출발은 1990년 안강지점 개점과 함께였다. 37년의 농협 근무 중 무려 17년을 안강지점에서 보냈다. "지금도 안강 고객들이 '다시 안강으로 발령받아 오라'고 안부 전화를 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참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그는 경주와 포항 지역 여러 사무소를 거치며 금융 실무 경험을 쌓았고 성과도 꾸준히 이어졌다.
2005년 농협 창립기념일 우수직원상을 받으며 4급으로 발탁 승진했고 2004년부터 2012년까지 9년 연속 리테일 메리트 우수직원 표창을 받았다.
2013년에는 4급 승진 후 8년 만에 지점장 급인 3급으로 다시 발탁 승진했다. 당시 통상 3급 승진까지 12~15년이 걸리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사례였다.
2016년 포항 대신지점으로 발령받았을 때는 실적이 낮은 지점을 맡아 2등급으로 끌어올렸다. 이후 2019년 M급으로 승진하며 처음으로 영덕군지부에 발령됐다.
2020년에는 KDI국제정책대학원 핵심경영 관리자과정을 수료하며 전문성을 더했다.
정 지부장은 무엇보다 고객과의 신뢰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는다. "은행 마감시간이 지나도 기다렸다가 고객 업무를 처리해 드리곤 했습니다. 몸이 불편한 고객은 직접 찾아가 서류를 받고 교도소까지 찾아가 대출 연기 서류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신입 직원 시절에 한 후배가 약속어음을 실수로 파쇄기에 넣어버린 아찔했던 사건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밤을 꼬박 새우며 종이 조각을 일일이 맞췄고 결국 은행과 금액을 찾아내면서 함께 해결했다는 뿌듯함이 컸습니다."
힘든 순간도 있었다. 금융위기 등으로 고객이 가입한 상품에서 원금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큰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또 보이스피싱 피해를 제때 막지 못한 사례는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고 했다.
"친절하게 도와드린다고 고객의 송금 업무를 처리해 드렸는데 나중에 보이스피싱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 조금 더 강하게 말렸다면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아쉽습니다."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부장 임명이 늦어졌던 점도 솔직히 털어놨다. "농협 조직이 보수적인 편이라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조금 더 일찍 기회를 얻었다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고객과 함께 성장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고객을 진심으로 대하면 결국 마음이 통합니다. 고객 집을 방문하고 사비로 선물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고객들이 집안 이야기까지 털어놓을 때면 신뢰가 쌓였다는 걸 느낍니다."
현재 영덕군지부는 농업 지원과 금융 기능을 함께 수행하고 있다. 지부 2층에서는 지역 농·축협 지도와 농업인 지원, 후계농 육성, 여성농업인과 청년농 지원 사업 등을 추진한다. 또 영덕군과 협력해 농촌 인력중개 사업을 운영하며 2024년에는 연간 4만 명, 2025년에는 3만3천 명의 인력을 연결했다.
1층 농협은행의 금융 규모도 상당하다. 총수신 5천449억 원, 총여신 3천285억 원 규모다. 올해는 영덕군과 함께 총 24억 원 보증 규모의 소상공인 특례보증 이차보전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정 지부장은 "농협은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라 농업과 지역을 함께 지키는 조직"이라며 "영덕 농업인과 지역경제를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얼마 남지 않은 퇴직 이후 계획을 묻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사실 특별한 취미가 없지만 여건이 되면 셔플댄스도 배우고 좋아했던 시도 다시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주에 퇴직 후에도 일이 찾아온다니 그 말도 믿어보려고 합니다."
NH농협은행 영덕군지부의 첫 여성 지부장인 정창미 지부장이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서 사업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
남두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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