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보듬 6000 사업이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부모들의 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다. <권기웅기자>
혼수비 지원으로 결혼 문턱을 낮추고, 공동육아나눔터와 마을돌봄으로 아이 키울 걱정을 덜어준 경북 영주시의 생애주기형 정책이 청년층의 정착과 혼인 증가로 이어지며 저출생 대응의 현실적 해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청소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이 먼저 났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시간이 온전히 저희 둘의 시간이 됐습니다." 영주시 휴천동의 신혼부부 오유섭(29)·장수진(27) 씨에게 로봇청소기는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니다. 맞벌이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저녁, 지친 몸을 조금 덜어주는 생활의 여유이자 결혼생활의 숨통을 틔워준 상징 같은 물건이다. 이들 부부는 결혼을 준비하던 중 영주시의 '20대 결혼 축하 혼수비용 지원사업'을 알게 됐다. 다른 지역의 신혼부부 지원책을 찾아보던 중 우연히 접한 정책이었다.
처음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을 따지지 않고 지원 폭도 넓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곧바로 신청했다. 평소 꼭 사고 싶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망설였던 로봇청소기를 이 지원 덕분에 장만할 수 있었다. 장씨 부부는 "혼수비 지원이 없었다면 선뜻 구매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제는 매일 집안을 돌며 청소해주는 필수 가전이 됐고, 퇴근 후 훨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결혼을 앞둔 젊은 부부에게 혼수비는 작지 않은 벽이다. 월세와 대출, 예식 비용, 가전 마련까지 한꺼번에 몰리는 시기에 지자체의 직접 지원은 결혼을 '미루는 이유' 하나를 덜어낸다.
영주동에 사는 이선옥(46) 씨가 말한 공동육아나눔터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핵가족화가 짙어진 요즘,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며 가장 절실한 것이 '정보'와 '연결'이라고 말한다. 이씨는 공동육아나눔터를 "든든한 울타리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이곳에서는 단순히 아이들이 놀 공간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들이 서로 만나고, 육아 정보를 주고받고, 재능을 나누며 함께 아이를 키우는 관계망이 형성된다.
특히 품앗이 활동은 이씨에게 인상 깊은 프로그램이었다. 또래 자녀를 둔 부모들이 월 2회 정기적으로 만나 육아 고민을 나누고, 아이들과 함께 체험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결국 부모 혼자 감당하는 싸움이 아니라는 점,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나누고 의지할 수 있다는 점이 공동육아나눔터의 힘이다. 그는 "영주 지역의 많은 부모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공간"이라고 했다.
가흥동의 맞벌이 부모 김근수(39) 씨에게는 'K보듬 6000' 사업이 그런 안전망 역할을 했다. 주말 근무가 있는 날이면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집에 두고 나와야 하는 불안이 늘 따라붙었다. 하지만 마을돌봄터를 이용하게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신청 절차가 간편했고 현장 접수도 가능해 이용 문턱이 낮았다. 아이는 돌봄교사들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시간을 보냈고, 별도 프로그램까지 운영돼 집에 돌아와서도 "또 가고 싶다"고 할 만큼 만족해했다. 김씨는 "돌봄 공백에 대한 부담을 덜고 안심하고 일할 수 있어 정말 든든하다"고 말했다.
영주시 저출생 대응 범부서 TF팀이 결혼,주거 등 생애주기별 맞춤정책을 논의하고 있다. <영주시 제공>
혼수비 지원, 공동육아나눔터, 마을돌봄터.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사업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돌봄의 공백을 메우며 지역에 정착하게 하는 '생애주기형 지원'이다. 영주시가 최근 저출생 대응에서 주목받는 이유도 이 지점에 있다. 지원 정책이 결혼식 하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전후의 경제적 부담, 육아의 고단함, 돌봄의 공백, 주거와 일자리 문제까지 한 줄로 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수치도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영주시에 따르면 2025년 혼인 건수는 313건으로 전년보다 22.3% 증가했다. 최근 5년 사이 가장 높은 수치다. 전국 평균 증가율 8.1%, 경북 평균 1.0%를 크게 웃돌았고, 경북 시 단위 지자체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시는 코로나19 이후 지역경제 회복과 투자 유치, KTX 중앙선 개통에 따른 접근성 개선 등을 배경으로 꼽는다. 여기에 청년층이 체감할 수 있는 정주 여건 개선과 생활밀착형 지원정책이 혼인 증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영주시는 이 흐름을 일시적 반등으로 끝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혼인 증가를 출산과 정착으로 연결하기 위해 출산·돌봄·주거·일자리 등 생애주기별 맞춤형 정책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 시는 출산·돌봄·주거·일·생활 균형·양성평등·만남·결혼 지원 등 6대 핵심 분야 126개 사업에 1천338억원을 투입하고 있다. 출산 지원 확대와 돌봄 공백 해소, 청년·신혼부부 주거 지원, 일자리 연계, 가족친화 프로그램 운영 등으로 지원체계를 촘촘히 짜고 있다.
행정 방식도 달라졌다. 영주시는 저출생 대응 범부서 TF를 꾸려 지방시대정책실장을 중심으로 협업 체계를 만들고, 결혼·출산·돌봄, 안심 주거, 일·생활 균형의 3대 분야를 중심으로 통합 대응하고 있다. 만남을 주선하는 단계에서부터 결혼 전후 비용 부담을 낮추고, 아이를 낳은 뒤에는 돌봄 기반을 마련하며, 이후에는 주거 안정과 일·가정 양립으로 연결하는 구조다. 한 부서가 한 사업만 맡는 방식으로는 풀기 어려운 인구 문제를 삶 전체의 동선으로 따라가며 풀어보겠다는 시도다.
오씨 부부의 로봇청소기, 이씨가 만난 육아 공동체, 김씨가 맡긴 주말 돌봄교실은 통계표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장면들이 도시의 미래를 바꾼다. 청년에게는 결혼을 결심할 이유가 되고, 부모에게는 아이를 낳고 기를 용기를 주며, 지역에는 떠나지 않고 살아볼 만하다는 신호가 된다.
엄태현 영주시장 권한대행은 "지역의 변화는 저출생 해법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혼을 망설이게 하는 비용을 낮추고, 아이를 키우며 부딪히는 불안을 덜어주고, 일과 가정을 병행할 수 있도록 받쳐주는 것. 청년이 지역에 남을 수 있도록 삶의 조건을 하나씩 손보는 것. 결국 인구정책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일상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기웅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