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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욱의 민초통신] 21세기 암흑의 핵심

2026-04-28 06:00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민병욱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소설 '암흑의 핵심'은 19세기 말 런던에서 발표됐다. 당시는 영국을 비롯한 서구 신제국주의가 정점으로 치닫던 때다. 산업혁명을 거쳐 문명화한 백인이 미개 인종을 개화 계몽할 의무를 진다며, 아프리카 등지로 뻗어 식민지를 늘려가는 데 온 국력을 쏟고 있었다.


런던은 그런 해양 대제국 핵심 기지였다. 폴란드 태생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는 선원으로 세계 곳곳을 항행하며 열강이 각축하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했다. 어둠을 깨 빛을 준다며 벌이는 식민 전쟁이 실은 더 깊은 암흑의 심연에 빠져드는 것이란 역설을 그는 소설 속에 처절히 그려냈다.


# 권세와 탐욕, 어두운 공포


선원 '말로'가 벨기에 식민회사의 기선 선장으로 취직해 콩고강을 거슬러 올라간 여정을 술회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그의 임무는 '커츠'란 주재원을 데려 나와 문명사회에 복귀시키는 것. 커츠는 백인 문명과 진보의 메신저로 아프리카에 왔으나, 수탈에 급급해 학살 광기 등 오히려 더 야만적 '비인간'이 돼버린 사내였다.


내륙 오지로 항행하며 말로는 백인이 저지른 전쟁·인종차별·약탈·살인 등 온갖 더러운 짓을 목격한다. 상아를 더 빼앗기 위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그곳에서 커츠는 인간으로서 심성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무자비한 권세, 탐욕의 그림자가 속이 텅 빈 그를 휘감았고 화려한 언변만 살아 원주민의 신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커츠는 제국주의가 의인화한, 정복자 논리에 함몰된 인물이다. 소설 앞머리, 작가는 이 점을 명확히 정리해 둔다. "정복자에게 필요한 건 포악한 힘뿐이야. 그들은 단순히 획득이라는 목적을 위해 획득할 수 있는 모든 걸 움켜잡을 뿐이지. 그건 폭력을 쓰는 강도 행위요, 대규모로 자행되는 흉측한 살인 행위에 불과한 거라고…"


"세계의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보다 코가 약간 낮은 사람들을 상대로 자행하는 약탈행위가 아닌가… 이 불미스러운 행위를 대속(代贖)해 주는 건 이념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념이야말로 우리가 설정해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며 제물을 바칠 수 있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고 강조한다.


우여곡절 끝에 말로는 커츠를 만나고 배로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그의 몸과 마음은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은 상태였다. 그동안 그가 행한 음침한 오만과 무자비한 권세의 결과에 겁먹은 듯 공포와 기약 없는 절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커츠는 죽음 앞에 속삭이듯, 숨결 같은 낮은 소리로 단 두 마디를 읊조린다. "무서워… 무서워라! (the horror… the horror!)"


#지옥은 바로 지금 여기


타락한 제국주의와 인간 본성, 어둠과 공포가 서로 물린 이 소설 이미지는 워낙 강렬해 20세기엔 영화로 제작됐다. 베트남전 배경 '지옥의 묵시록'이 그것이다. 미군 특수부대 '윌러드'대위는 경비정을 타고 정글 상류에 가 '커츠'대령을 제거하란 임무를 받는다. 원작 소설처럼 커츠도 한때 유능한 군인이었으나 정글에 들어간 뒤 원주민들 위에 앉아 사이비 교주처럼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정글로 난 강을 오르며 윌러드는 지옥이 따로 없는 참상을 마주한다. 무차별 학살과 폭격, 아군 간 살육과 난교 파티 등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영화 제목 '아포칼립스 나우(Apocalypse Now)'는 '지옥은 바로 여기'란 뜻. 그걸 실증하듯 화염과 공포가 천지에 가득한데 폭격 현장 스피커에선 "미군은 여러분 안전과 평화를 위해 이곳에 왔다"라는 선전문이 끝없이 방송되는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영화의 압권은 '킬고어' 중령이란 인물의 행동이다. 헬리콥터 대대장인 그는 수십 대의 헬기 편대로 민간마을을 폭격하며 바그너의 악곡, '발퀴레의 기행'을 귀가 터지게 틀어댄다. 헬기의 비상과 진격, 융단폭격의 순간을 공연장 무대처럼 연출하고 시뻘겋게 타오르는 전장의 바로 코앞 해변에서 또 파도타기 서핑을 즐긴다.


기병대 모자, 카우보이 스카프와 선글라스로 멋을 낸 그는 미국 문명의 총아이자 쇼맨십에 빠진 사내다. "나는 아침의 네이팜탄 냄새를 사랑한다"라는 대사처럼 그에게 전쟁은 그저 게임이고 자기를 드러내는 쇼일 뿐이다. 그런데도 전투에선 승리하고 부하를 챙기며 멋과 낭만도 아는 출중한 지휘관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원작과 달리 커츠 대령은 윌러드 손에 살해된다. 원주민들은 그들의 신을 제거한 윌러드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는 표표히 현장을 떠난다. 이 비이성과 무질서, 광기의 현장에서 커츠와 킬고어는 무엇이 다른가. 학살과 약탈, 무자비한 권세를 떠받드는 이념이 있다면 그건 인간 생명보다 얼마나 소중한가. 의문은 여전히 윌러드의 숙제로 남았다.


# 트럼프의 아포칼립스


19세기 '암흑의 핵심', 20세기 '지옥의 묵시록'은 소설이나 영화일 뿐 21세기에 현실화하리란 생각을 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작년 가을 소셜미디어에 묘한 사진을 올리고 '치포칼립스 나우'란 설명을 붙였을 때도 조금 심한 장난일 뿐 그 비슷한 일을 벌이리라고 생각한 사람 역시 없었을 것이다.


'치포칼립스'는 시카고와 아포칼립스의 합성어다. 그러니 시카고에서 대대적 이민 단속을 벌이겠다는 예고 정도로 사람들은 해석했다. 문제는 사진이었다. '지옥의 묵시록' 킬고어 중령의 기병대 모자에 군복 차림 선글라스를 낀 트럼프 대통령 모습과 그 뒤로 불타는 시카고 건물, 또 그 위를 나는 전투기 사진들이 합성돼 있었다.


더 섬뜩한 건 킬고어의 유명 대사까지 빌어온 것이었다. "나는 아침의 추방 냄새를 사랑한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오만한 권세와 지극한 자기애의 합성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숙고했어야 옳았다. 세계의 패권국가 미국 대통령이 즉흥적이며 독선적 쇼맨십에 빠졌다면 세계 정치 지도에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해야 옳았다.


대부분 나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 '포악한 힘'이 무서워서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는 그걸 이용했다. 경제난으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난 이란을 이참에 쓸자고 설득했다. 시위자 학살 정부를 축출해 신정체제를 끝내고 원자탄 개발도 막는다는 명분(이념)을 속삭였다. 선전포고도 없는 대폭격으로 이란전쟁은 시작됐다.


초등학교를 오폭해 160여 어린이를 죽이고도 사과는 없었다. "한 문명 전체를 사라지게 하겠다"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이젠 일상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석유를 가져와 큰돈을 벌겠다는 제국주의적 약탈 야욕을 거침없이 드러내더니 아예 자신을 예수에 빗대는 병적 자기애 모습도 여과 없이 보인다.


해협은 봉쇄되고 자유 통행이 언제 재개될지 기약도 없다. 세계는 지금 길을 잃었다. 이 암흑의 끝이 어딘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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