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향기로운 님의 목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한용운 「님의 침묵 중」)
요즘 좀 늦은 시간에 현관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왜 꽃향기가 가장 먼저 느껴지고 새소리가 그 다음에, 그리고 풍경은 나중에야 눈에 들어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님의 침묵도 향기-목소리-얼굴이다. 물리적으로는 풍경(빛)-소리-향기의 순서여야 맞다. 빛과 소리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속도에 차이가 있고 공기의 움직임에 의해 이동하는 냄새는 그 무리에 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또 감각기관을 통해 수용된 후에도 뇌까지 도달하고 처리하는 데서도 향기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느리다.
필자가 사는 산속 마을에서 새소리는 봄부터 가을까지 듣게 되지만 꽃향기는 요즘이 절정이다. 꽃이 향기를 내는 것은 수분을 매개할 수 있는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향기를 맡고 꽃으로 날아와 꽃가루를 암술 머리에 발라준 곤충은 그 보상으로 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곤충을 유인한 향기는 꿀 향기가 아니다. 꿀은 대개 꽃의 가장 깊은 곳 안쪽에 위치한 밀선에서 분비되지만 꽃의 향기는 꽃잎이나 수술·꽃자루 등에 있는 향기샘에서 나온다. 우리가 먹는 꿀에서도 독특한 향기가 나는데, 이는 대부분 벌이 꿀을 모으는 과정에서 향기샘에서 나온 향이 꿀에 들어가 섞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향기를 가장 먼저 느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아마 다른 것보다 향기가 주는 감동이 더 인상적이고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용운은 떠난 님의 시각적 아름다움보다 그만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향에 더 짙게 매료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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