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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그단새] 백년이 지나 알게 된 것들

2026-06-02 06:00
안도현 시인

안도현 시인

나는 안동시 풍산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풍산평야가 1천652만9천㎡(500만평)이나 된다는 곳이다. 1976년 안동댐이 준공되기 전까지 여름이면 해마다 강이 넘쳐 홍수가 났다. 붉은 황토물이 면소재지 근처 우리 가게 앞까지 넘실거리며 밀려왔다. 6학년 초에 나는 사촌형을 따라 대구로 갔고, 아버지는 식구들을 이끌고 경기도 여주로 이주했다. 1973년이었다.


그로부터 딱 오십년 전, 1923년 풍산에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다. 풍산읍 안교리에서 풍산소작인회가 창립되었다. 소작료 인하 등을 요구하며 200명의 회원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1년 만에 회원이 5천명으로 늘어났다. 풍산소작인회 사무실이 우리 가게 뒤쪽으로 50m쯤 되는 곳에 있었다. 풍산소작인회를 주도한 이들이 권오설, 이준태, 김남수 등이었다. 이준태는 풍산읍 상리 출신이고, 김남수는 예안면 출신이다. 김남수는 서울대 국문과에 몸담았던 문학평론가 김용직 선생의 아버지다.


1897년생 권오설은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출신이다. 1930년 4월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최후를 맞았다. 서른네 살이었다. 고택이 즐비한 가일마을은 어릴 때 어느 날 어른들을 따라 마을 못둑으로 봄나들이를 갔던 곳. 2001년에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가 세워진 바로 그 자리.


그동안 아무도 지나간 백년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막연하게 사회주의자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사람으로 알고 있던 권오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 건 노트북이었다. 노트북은 김희곤, 장석흥 교수 등의 논문을 찾아보라 했고,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에서 펴낸 '권오설'(푸른역사)을 사서 보라고 안내했다.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하는 가일마을 권오설의 족적을 따라가다가 놀랍게도 김재봉을 만났다.


1891년생 김재봉은 가일마을과 가까운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248번지 출신이다. 그는 1925년 4월에 창당한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였다. 권오설을 서울로 불러들인 사람이 김재봉이었다. 1925년 2월에 김재봉의 하숙집에 모여 조선공산당 창당계획을 결의할 때 조봉암도, 박헌영도, 김단야도, 권오설도 거기 있었다. 권오설이 한낱 수많은 '항일구국열사' 중 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진 직후에 고려공산청년회가 창립되었고 권오설은 박헌영에 이어 두 번째로 책임비서를 맡은 중요한 인물이었다.


김재봉은 1931년 출옥 후 고향인 풍산 김씨 집성촌 오미리로 내려와 1944년까지 살다 죽었다. 그가 오미리로 내려올 때 그 마을에 살던 1908년생 내 외조부 임돌암은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아마 소작농이었을 것이다. 학암고택에 살던 김재봉과 여러 차례 만났을 테지만 생전에 내게 말해준 적은 없었다. 사실 나도 반공웅변대회 준비하느라 제법 바빴다.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1925년 8월에 발생한 '예천형평사 사건'이다. 진상조사와 사태 수습을 위해 서울에서 5명으로 실행위원회를 꾸렸는데, 여기에 김재봉과 권오설의 이름이 들어 있다. 백년은 골동품이 될 만한 시간이지만 바로 어제이기도 하다. 입에도 담지 못하던 초기 조선공산당이 멀지 않은 곳에 살던 인물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조금 들떠 있다. 그동안 세월을 낭비했으니 나 혼자라도 공부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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