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 너머 신용을 발견하다
사회적 가치를 담보로 대출
지역 안에서 돌고 쌓이는 돈
실증이 제도를 앞서는 공백
기재부 약속 현장과 연결해야
김지영 <재>대구사회가치금융 상임이사
"왜 가장 절박한 사람이 가장 비싼 돈을 써야 하는가." 현 금융 시스템에 대한 대통령비서실 김용범 정책실장의 고백이다. 전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말이니 무게가 남다르다. 세 편에 걸친 그의 글은 한국 금융의 구조적 민낯을 정면으로 해부한다. 신용등급이 과거의 잔상으로 미래를 결정하고, 가장 많은 사람이 머물러야 할 중간 지점이 텅 비어버린 도넛 시장. 구조가 위기를 만들었는데 대가는 언제나 가장 밑단의 사람이 치른다는 진단이다. 그런데 그 진단이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된다. 대구에선 이미 다른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재>대구사회가치금융은 2022년 보조금과 법적 근거의 공백 속에 지역 주체 30여곳이 시드머니 1억6천만원을 모아 출발했다. 4년이 지난 지금 공제 가입사 55개소, 자조기금 16억6천만원, 누적 대출 12억8천만원이라는 숫자가 쌓였다. 공제부금 대출의 연체율은 0%다.
이 숫자를 만든 것은 담보도 없고 신용등급도 낮은 사회연대경제기업들이다. 기존 시스템이 위험하다고 분류한 바로 그들이다. 매출 흐름, 부채 구조, 현금 회전율도 중요한 기준이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기업이 지역 공동체 안에서 어떤 관계를 쌓아왔는가. 사업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가치가 실재하는가. 어려운 국면에서 어떻게 버텨왔는가. 이것들은 수치화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존 신용평가 모델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됐다. 재단은 그 영역을 심사 테이블 위에 올렸다. 재무 지표와 관계·임팩트 지표가 함께 놓일 때, 기존 금융이 놓쳤던 실체가 비로소 보인다. 김 실장의 표현을 빌리면 '신용은 배제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 정교한 이해에서도 만들어진다'라는 그 명제를 현장에서 4년째 검증하고 있다.
재단은 세 개의 자금 축을 함께 운영한다. 첫째는 공제부금이다. 기업이 매달 부금을 쌓고, 부금이 이웃 기업의 자본이 된다. 둘째는 임팩트펀드다. 지역 기업이 영업이익의 1%를 자발적으로 출연해 후배 기업의 성장 자본으로 순환시킨다. 셋째는 햇빛펀드로, 국·공유 주차장 태양광 발전 수익의 일부를 지역발전기금으로 자동 환류하는 구조를 설계 중이다.
세 축이 맞물리면 돈이 쓰이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돌고 쌓이는 구조가 된다. 사람과 돈과 자원이 지역 안에 축적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지역완결형 사회연대경제 생태계다. 지금까지 4년의 기록은 성공 사례 모음이 아니라 시행착오와 학습의 과정이다. 실증례가 축적될 때 비로소 제도가 따라올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문제는 그 실험이 정책적 공백 속에서 자주 주춤한다는 것이다. 사회연대경제기본법 제정을 앞뒀지만 중개기관 지정 근거, 공제부금 세제 혜택 등 현장이 필요로 하는 제도들은 여전히 빈칸이다. 빈칸이 클수록 실험의 속도는 느려지고 실증의 밀도는 옅어진다.
김 실장은 글을 이렇게 맺는다. "잔인한 금융의 시대를 넘어, 연결된 금융으로 나아가자". 전환의 가장 빠른 방법은 이미 작동하는 다른 방식을 키우는 것이다. 2018년 기재부가 약속한 사회적경제 도매기금, 얼마 전 지역기금 네트워크가 청와대 간담회에서 제안한 마중물 기금. 그 약속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이 현장과 연결할 때다. 신호가 쌓이면 경로가 된다. 경로가 쌓이면 제도가 된다. 선언은 대통령실에서, 실증은 현장에서, 제도는 그 둘이 만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이 대구사회가치금융재단이 서 있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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