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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정종 태실터 체계적 발굴·연구 가치 충분하다”

2026-06-21 14:35

일제강점기 태항아리 반출 이후 100년 가까이 훼손된 상태 지속
조선 왕실 1등지 명당, 일제 훼손 후 관리 주체 불명확해 방치

직지사 대웅전 뒤 북봉(100m) 정상의 정종 태봉 전경.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데다, 오랜 세월 방치된 탓에 둘레석 1점과 기초석 몇 점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직지사 대웅전 뒤 북봉(100m) 정상의 정종 태봉 전경.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데다, 오랜 세월 방치된 탓에 둘레석 1점과 기초석 몇 점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조선조는 태조(이성계)로부터 시작돼 마지막 순종까지 27명의 임금이 통치하는 가운데 519년을 존속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조선조에서 2대 임금인 정종의 존재감은 아주 희미하다. 그는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을 주도한 동생(이방원)에 의해 갑자기 세자로 추대돼 보위(1398~1400년)에 올랐으나 이듬해 권력 실세인 이방원(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이러다 보니 짧은 재위 기간(약 2년 2개월) 동안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낼 틈도 없었고, 애당초 과도기의 얼굴 마담이었던 그의 정치적 위상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정종이지만, 그는 직지사에 자신의 태봉(胎封:임금의 태를 묻은 곳)을 두고 김천(김산)에서 존재감을 떨쳐왔다. 정종은 즉위년에 고향인 함경도 함흥에 묻혀 있던 자신의 태(胎)를 사두혈의 명당으로 이름난 직지사 대웅전 뒤 북봉에 안치하고, 직지사를 태실을 수호하는 수직(守直) 사찰로 지정하는 한편 이곳을 '태봉'이라 명명했다. 지금의 '직지사 정종대왕 태실터(直指寺定宗大王胎室址)'이다.


직지사 극락전 잔디밭으로 옮겨진 정종 태봉 중동석.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태실터이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직지사 극락전 잔디밭으로 옮겨진 정종 태봉 중동석.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가 태실터이다.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정종의 태봉은 직지사와 김천(김산)의 위상 변화로 연결된다. 우선 직지사가 수직사찰로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국시로 한 조선조에서도 사세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으며, 행정체계도 현(縣)에서 군(郡)으로 승격돼 지명도를 한껏 높이며 영남의 중심부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하는 등 태봉 소재지로서의 이점을 한껏 누렸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김천으로서 정종태실 이안(移安)은 엄청난 기회였다. 당장 지방수령직 중 최하위인 종6품 현감의 작은 고을에서 종4품 군수가 부임하는, 영남의 중심고을 가운데 하나로 급부상하는 효과를 거뒀다"며 "이는 곧 조선 초기에 김천이 번성할 수 있었던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조선 중기 김천의 대표적 문장가 조신(曺伸)은 "옛날 감문국에 딸린 작은 고을이 번성하고 백성이 많아진 것은 선대왕 태봉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직지사 성보박물관 앞의 정종 태봉 둘레석과 태실보수기념비(각각 2기).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직지사 성보박물관 앞의 정종 태봉 둘레석과 태실보수기념비(각각 2기).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그러나 오랜 세월 방치된 탓에 자연으로 복원된 정종의 태실 터엔 태봉 잔해만 몇몇 점 흩어져 있을 뿐, 본래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여기에다 태봉의 핵심인 정종의 태항아리도 없어진 지 100년 가까이 됐다. 송 국장은 "정종의 태봉은 왕실과 직지사의 보호 아래 보전돼 왔으나 일제강점기인 1928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에 산재한 태실을 한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태항아리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갔다"며 "이는 조선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며, 이 일이 있은 이후 정종의 태봉은 지금까지 방치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해방 이후엔 태봉에 대한 관리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현실이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현재 정종 태봉의 부속물은 직지사 극락전 잔디밭의 중동석 1기, 성보박물관 앞의 둘레석 2기와 태실보수기념비 2기, 태봉 주변의 둘레석 1기, 기초석 몇몇 점 등의 석물이 남아 있다.


송 국장은 "정종 태봉은 조선조에서 왕으로 등극한 27명에게만 주어진 1등지의 하나로서, 체계적인 조사와 발굴을 통해 조선 초기 태실 연구에 활용할 가치가 충분하다"며 "아울러 이 과정에서 유실된 석물을 비롯한 부속물을 수집하는 등 향후 복원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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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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