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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양 외과의사가 바라본 일본 풍경-20]에도시대 의사들, 그리고 난학, 해체신서

2026-07-03 08:40
해체신서. 국회도서관에서 열람했다. 너무나 정교해서 내가 학생 시절 공부하던 해부학 책을 펼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임 원장 제공>

해체신서. 국회도서관에서 열람했다. 너무나 정교해서 내가 학생 시절 공부하던 해부학 책을 펼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임 원장 제공>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족하지만, 에도 시대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 병을 치료했다.


에도시대 '의성(醫聖)'으로 추앙받는 나가타 도쿠혼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소에 등짐을 실고 일본 전역을 유랑했다. 환자의 신분이나 빈부격차에 상관없이 진료비는 국수 한 그릇 값인 '16문'만 고집해 백성들은 그를 '16문 선생'이라 불렀다.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다. 영주의 병을 고친 후 높은 관직과 금은보화를 제안받았을 때도, 그는 "소 한 마리와 16문이면 족하다"며 서민들 곁으로 돌아갔다.


이 시기 조선에서도 제도권 의학의 중심에 어의 허준이 있었고, 재야에는 재물과 벼슬을 멀리한 채 서민 속에서 자기 역할을 다한 많은 명의가 존재했다.


그 시대 그들이 강조한 건강의 핵심은 명쾌했다.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라(육체)',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편히 가져라(정신)'


당시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어도, 주기적으로 창궐하는 전염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원인은 몰랐고 치료법도 없었다. 이 한계 앞에서 조선의 의학은 기존의 틀을 고수했으나, 에도 시대의 몇몇 의사들은 의학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쇄국 정책이었지만, 일본은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에 유일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다. 이곳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과 학문을 '난학(蘭學)'이라 불렀다.


의사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는 네덜란드 의학서에 그려진 인체 내부 구조를 보고 의문을 품었다. 자신이 공부한 해부서에서 본 오장육부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이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사형장을 찾아가 관리인을 매수하고 인간의 내부를 관찰했다. 결과는 충격이었다. 실제 인간의 몸속은 난학 해부서의 그림과 일치했다. 자신이 믿어온 지식이 무너지는 신세계를 목격한 것이다. 네덜란드어를 한마디도 못 하던 동료 의사 4명과 글자를 하나씩 짜 맞추며 밤낮으로 매달렸고, 4년 만인 1774년 마침내 번역서 '해체신서'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이론적으로 해부학에 치중했지, 당대 유행하던 천연두나 콜레라 같은 감염병에서 당장 환자들을 구하지는 못했다. 실질적인 방역과 치료는 후대 의사들 몫으로 남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체신서'는 일본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기존의 전통 관념에만 머무르지 않고, 서양 과학의 합리성과 실용주의를 수용함으로써 후대 메이지 시대의 정신적·학문적 토양이 되었다.


교토 북쪽 스키다 겐파쿠의 고향인 오바마 시에 1983년 세운 기념 병원이 있다.<임 원장 제공>

교토 북쪽 스키다 겐파쿠의 고향인 오바마 시에 1983년 세운 기념 병원이 있다.<임 원장 제공>

나는 겐파쿠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그가 시신을 해부했던 코즈캇파라 사형장 터는 훗날 개혁가 요시다 쇼인도 처형된 비극의 현장이었으며 현재는 절로 바뀌어 있고 일본 의사회에서 세운 기념비가 있다. 형장으로 끌려가던 죄수들이 가족과 마지막 눈물의 이별을 나눴던 '나미다바시(泪橋, 눈물의 다리)'는 복개되어 사라졌고, 지금은 교차로와 버스정류장에 이름만이 남아 있었다.


시내 도라노몬 빌딩 사이, 조그만 절의 구석진 곳에 있는 겐파쿠의 묘소를 어렵게 찾아 참배했다. 그를 기리는 기념 병원은 교토에서 북쪽으로 2시간 거리인 오바마시에 1983년 세워져 지금도 지역 환자들을 보고 있었다. 해체신서는 국회도서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내가 학생 때 공부한 해부학 책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할 정도로 정확해서 놀랐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동맥, 정맥, 신경 같은 용어는 겐파쿠가 번역한 용어이다. 영어로 동맥(artery) 정맥(vein)은 공기, 물줄기 같은 인체, 우주에 대한 그 당시의 인식으로 이름 붙였다. 마찬가지로 이런 이름 하나하나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데 겐파쿠는 온 힘을 쏟았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동치는 모습을 보고 동맥이라 불렀고, 정적으로 퍼져 있는 핏줄을 보고 정맥이라 이름 붙였다.


그들은 과학적 사실은 많이 몰랐지만 우리 인체에 대해 훨씬 더 고민을 하고 치료에 임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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