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105개 반도체 기업을 망라한 구미반도체산업기업인협의회는 그저께 열린 정기총회 및 사업설명회에서 더 이상 팹 유치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팹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기반을 먼저 만들겠다는 결연한 구상을 밝혔다. 정부의 호남권 반도체 투자 방침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대구경북 반도체 업계의 첫 대응이었다. 정치논리가 아니라, 실력과 실행으로 난관을 뚫겠다는 자강(自强)의 정공법에 주목한다. 정부에 손 벌리며 징징대기보다 대기업이 제 발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최적의 환경을 구비하겠다는 업계의 결의에 신뢰를 보낸다.
구미 반도체 업계의 대응전략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산업생태계 고도화'다. 반도체 소재·부품 생산거점에 머물지 않고 전공정 웨이퍼 제조와 후공정 첨단 패키징 기판 소재까지 아우르는 제조·실증 플랫폼을 구축하겠다는 게 핵심 전략이다. 상식을 벗어난 정부의 호남 투자 결정에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차별화된 전략으로 대응한 것에 눈길이 간다. 산업화의 맏형 격인 구미의 진중한 선택이다.
정부는 이날 구미 반도체 업계가 채택한 대(對)정부 건의문을 주목하길 바란다. 핵심 요구는 '첨단 화합물 반도체 웨이퍼 제조 실증 플랫폼 구축'과 '첨단 패키징 기판 소재 제조 및 실증 인프라 구축'이다. 수조원대 투자가 필요한 분야다. 기술 확보와 인재 양성, 안정적 전력·용수·교통 인프라도 뒷받침돼야 할 사업이다. 지방정부·민간기업 단독 추진에는 한계가 있다. 호남으로 반도체 투자를 올인하다시피 한 정부가 이조차 외면하면 안 된다. 두 사업에 선정되면 구미는 비로소 전·후공정 제조·실증 플랫폼을 완비하게 된다. 단순한 부품 공급지를 넘어 종합 반도체 클러스터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리되면 자연히 투자 매력도 높아진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서는 소재·부품·후공정 인프라가 갖춰진 지역에 팹을 세워야 리스크가 적다. 호남에 대규모 투자 기회를 뺏긴 후 구미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긴 호흡의 승부수다.
호남권은 대규모 팹 직접 유치를 통해 단기간에 세계적 반도체 생산거점으로 도약하면 된다. 이에 대해 구미는 산업생태계 고도화를 통해 팹이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밖에 없는 기반을 만드는 장기적 전략으로 맞선 것이다. 두 접근은 상호 보완적이다. 팹 중심 거점(호남)과 생태계 기반 거점(구미), 생산 허브 호남과 생태계 허브 TK, 투트랙 국가전략이야말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과 지속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길이다. 이왕이면 두 거점을 국가 반도체 전략의 '생산 허브'와 '생태계 허브'로 공식 지정하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논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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