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지난 회에 현실의 세계인 사법계 그리고 진리의 세계인 이법계,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이사무애법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런데 궁극적 진리(理)와 현상 세계(事)가 둘이 아니며 따라서 깨달음과 현실, 공(空)과 색(色), 열반과 생사가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이사무애법계만 해도 충분한 것 같은데 왜 화엄에서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다시 설정했을까?
화엄이 사사무애법계를 설정한 이유는 이사무애법계가 여전히 이(理)와 사(事)라는 두 항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둘이 걸림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진리와 현상이라는 구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파도와 바다를 생각해 보자. 이법계에서는 바다가 중요하다. 파도는 잠시 나타난 형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법계에서는 파도가 중요하다. 각각의 파도는 독립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이사무애법계에서는 파도가 곧 바다이고 바다가 곧 파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파도는 바다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바다는 파도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전히 파도와 바다라는 두 개념이 남아 있다. '파도는 바다다'라는 말 자체가 이미 두 항의 관계를 전제한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더 이상 바다를 끌어올 필요가 없다. 모든 파도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동해의 한 파도는 태평양 전체와 연결되어 있으며, 과거의 모든 파도와 미래의 모든 파도와도 연결되어 있다. A라는 현상이 단순히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A라는 현상 자체가 B, C, D라는 모든 현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화엄의 유명한 비유인 인드라망(因陀羅網)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인드라망의 그물에는 무수한 보석이 달려 있다. 한 보석 안에는 다른 모든 보석이 비치고, 그 안의 보석에도 다시 모든 보석이 비친다. 따라서 하나의 보석을 보면 전체 우주를 보는 것이 된다. 여기에는 '진리'라는 중개자가 필요 없다. 보석과 보석이 직접 연결된다.
이 차이는 실제 삶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했다고 하면 이사무애법계의 사람은 '비난도 공이고 나도 공이다.'라고 여기거나 '이 또한 진리의 한 표현이다.'라고 여겨 분노에 휘둘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공'이라는 차원에서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 반면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시선이 달라진다. 그 비난하는 사람의 행동 속에서 그 사람의 어린 시절, 그 사람이 받은 상처, 그가 만난 사람들, 사회 구조, 역사적 배경, 나와의 관계, 미래에 일어날 결과까지 하나의 거대한 관계망으로 보게 된다. 비난은 단순한 개인의 행동이 아니다. 우주 전체가 그 순간 하나의 사건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비난하는 사람이 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역시 무수한 인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사무애법계에서는 한 잔의 커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노동, 세계의 질서가 구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커피 한 잔이 곧 '이(理)'를 드러낸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이 한 잔의 커피가 다른 모든 것들과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 이 커피는 농부, 수출업자, 바리스타, 카페 공간, 나의 감정, 옆자리 사람의 대화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 모든 요소는 단순히 연결된 것이 아니라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나의 경험 속에는 커피뿐 아니라 카페의 분위기, 시간의 흐름, 기억, 감정이 동시에 스며들어 있으며, 이 각각의 요소들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공존한다. 하나의 순간 속에 전체 세계가 '겹쳐' 있는 것이다.
이사무애법계를 사는 삶은 '모든 현상 속에서 근본 원리를 보며 살아가는 삶'이고, 사사무애법계를 사는 삶은 '모든 현상들이 서로를 그대로 드러내며 완전하게 얽혀 있는 삶'이다. 전자는 '이와 사의 일치'를 자각하는 삶이고, 후자는 '사와 사의 무한한 상호 침투'를 체험하는 삶이다. 이사무애법계의 삶은 흔히 말하는 '공성의 지혜'에 가깝다. 사사무애법계의 삶은 '연기의 지혜'가 완전히 꽃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사무애법계에서는 '모든 것은 공하다.'라는 통찰이 중심이고 사사무애법계에서는 '모든 것은 서로 안에 들어 있다.'라는 통찰이 중심이다. 전자는 분별을 녹여내고 후자는 관계를 무한히 확장한다.
화엄이 사사무애법계를 최종 단계로 설정한 이유는 궁극적 진리를 어떤 초월적 원리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이다. 만약 이사무애법계에서 멈춘다면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게 '이(理)'를 우위에 둘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현상 밖에 있지 않다. 진리는 현상들 사이의 무한한 상호 침투 자체다. 화엄이 바라본 최종 세계는 '현상이 진리를 드러내는 세계'가 아니라, 현상 하나하나가 곧 우주 전체인 세계, 다시 말해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세계다. 이것은 이사무애법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찰이 끝까지 전개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결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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