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행 반도체 클러스터
기업 자유의지 판단일까
지역균형발전 명분에도
‘대구 패싱’엔 대답 없어
정치 경제 리스크 안돼야
윤정혜 경제팀장
마치 지방선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반도체 호남투자설은 그렇게 수면 위로 올랐다.
처음엔 하나의 '안' 정도로 여겨졌다. 하나둘씩 등장하던 관련 뉴스들은 청와대 핵심 관계자, 정치권 핵심 인물과 같이 다양한 출처를 통해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 투자 규모도 300조원이던 것이 400조, 500조로 눈덩이마냥 불어났다.
급기야 "나오는 숫자들이 매우 낯설 것"이라는 청와대 정책실장의 발언과 함께 예상을 뛰어넘는 천문학적 규모의 호남 투자가 예고됐다.
그렇게 800조원에 이르는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안은 오피셜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군 이래 단일 투자로 최대 규모에 이르는 '메가 프로젝트'가 과연 어떠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확정되었느냐는 것이다. 전력·용수·인재·관련 산업 등 반도체 산업의 핵심 인프라 측면에서, 호남이 비수도권에서 과연 합당한 입지적 경쟁력을 갖췄는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가 깊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온전한 자유 의지와 기업적 판단으로 호남행을 택했냐는 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청와대와 정부는 지역균형발전과 국가 첨단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결정이라 설명하지만, 정작 균형발전을 외치면서 드러난 또 다른 지역 차별이자 지역 간 양극화를 만들 '대구 패싱'에는 침묵하고 있다.
정치가 경제를 통제한다는 시선과 이로 인한 부작용 우려는 비단 '메가프로젝트'에서 소외된 대구만의 생각일까. 공교롭게도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다음달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다. 당의 심장부인 호남을 향한 지도부의 구애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호남을 품어야 당권을 쥔다는 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입지 선정이 전당대회 일정이나 지지율 등을 고려한 정략적 결정이라는 시선이 나오는 이유도 이쯤에 있다.
외신에서도 뼈 있는 진단을 내놓았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13일자에 "SK하이닉스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그리고 더 많은 황금알을 낳아야만 한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한국 진보 정부가 기업을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게 뼈대다. 이재명 정부가 '돈나무'를 흔들고 싶어 한다는 내용도 있다. 반도체 투자 입지를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고 통제하려는 상황을 날카롭게 꼬집은 것이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이기도 한 국민의힘 고동진 의원은 "기업은 절대로 정치와 엮여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전문가들은 전력·용수·인력 등의 인프라는 물론, 소재·부품·장비의 집적도와 반도체 밸류체인 등 산업 생태계의 성숙도가 팹(Fab) 입지의 결정적 요소가 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반도체산업은 글로벌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만큼, 잘못된 입지 선정은 국가적 손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호남 반도체투자'가 대통령을 통해 공식 발표되던 날, 우려했던 '대구 패싱'이 현실로 다가오자 지역민들은 깊은 좌절감을 드러냈다. 대구의 한 경제인은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이 청년이 되었을 때, 과연 대구에 미래가 있을지 걱정스럽다. 기성세대로서 미안함이 앞선다"고 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정치 논리가 국가 백년대계를 뒤흔드는 악순환은 멈춰야 한다. 우리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사태를 통해 정치가 어떻게 경제의 거대한 리스크가 될 수 있는지 뼈아픈 경험을 이미 하지 않았나.
윤정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