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당해봐야 느낀다
호남 반도체는 될 리 없다
어느 쪽이든 TK는 체념
화병의 대구, 누가 구원할까
박재일 논설실장
6·3 지방선거 대구 원정 캠페인에 나섰던 정청래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말했다. "대구도 달라졌다. 민주당을 보는 눈길이 따뜻해졌다". 정치권의 베테랑 박지원 의원(전 국정원장)은 "대구도 우리가 먹는다. 경북 빼고 다 이긴다"고 했다. 보수의 성지마저 민주당으로 넘어온다는 희망회로였다. 선거는 파장났고, 민주당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요즘 대구 분위기가 묘하다. 정 전 대표의 말마따나 달라지긴 달라졌다. 나름 관측해보건대 거의 '니힐리즘'이다. 무기력, 환멸, 체념이랄까. 마치 득도(得道)한 듯하다. 뭘 해도 안되고, 할 의지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는 심리다. 그 근저에는 호남 800조 원 반도체 투자란 트리거(trigger)가 있다. 행성간 거리에서나 나올 법한 돈의 수치도 그렇지만, 용인 평택 다음의 반도체 공장은 대한민국 최초 전자단지 구미 혹은 대구 국가산단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이 박살났기 때문이다.
800조 퍼붓기를 회자하는 이들이 많다. 대략 두 가지 반응으로 압축된다. 먼저 'TK(대구경북)는 이제 머리박고 당해야 한다'는 자조다. 다른 하나는 '800조? 그게 제대로 될까'란 회의다. 전자는 찍어주지도 않았는데 뭐가 이쁘다고 대구에 삼성을 갖다주겠냐는 반문이다. 김부겸 전 대구시장 후보의 "이재명 정권에서는 나를 써 먹어야 한다"는 호소와 오버랩된다.
후자는 좀 논리적이다. 800조는 '이재명의 쇼'이고, 민주당의 무모한 호기(豪氣)란 분석이다. 10년도 더 걸리는 사업인데 대통령 임기는 이제 4년이 채 안 남았고, 삼성 SK가 그걸 모를 리가 있겠느냐는 주석을 단다. 전기, 물, 인재 공급 등 전문가적 해석도 곁들인다. 하긴 민원에 시달리는 용인이나 평택의 반도체 공장도 여전히 미완성이다. 반도체의 빅사이클도 100% 영원하진 않다. 아무튼 둘 다 허무주의에 자위의 마음이 내포돼 있다.
눈치챘듯이 800조가 정치적 의도라면 정치적 대응이 필요하다. 국가권력 분포상 호남의 대척점에는 현실적으로 TK권력이 자리한다. 800조가 발표된 지 몇 주가 지났지만 반항의 기미조차 없다. 이재명 정권이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속을 끓이기는 하나, 국회 소수파인 우린들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자조만 넘쳐난다. 하긴 성명서와 긴급 기자회견이 있기는 했다. 지역 갈라치기다, 정치적 논리에 휘둘린 결정이다, 대구경북이 초토화된다는 성토였으나 함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만약 윤석열 정권이 TK에 800조를 퍼붓겠다 했으면 그 반응이 어떠했을까. 그래서 TK는 어쩌면 윤석열 계엄의 최대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경북대 의대 출신으로 명의로 손꼽히는 이시형 박사는 '화병(Hwa-byung)'이란 독특한 병을 규명했다. 한글 병명이 등재될 만큼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다. 한국인 특히 여성들이 겪는 울화통을 주목했다. 화병은 혼자 삭이다 더 도진다. 이건 개인의 성향, 의학적 치유의 대상이지만, '정치적 화병'은 여지가 있다.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면 정치의 화병은 집단의 투쟁적 공간을 열어둔다. 정치는 감성이 표출되는 영역이고, 마냥 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대구는 대한민국 근대화 산업화를 선도한 도시다. 삼성그룹은 창업자 이병철의 자서전(호암자전·湖巖自傳) 서두에 '우리는 대구에서 업(業)을 시작했다'고 공식화한다. 그런 삼성이 대구를 마냥 비켜만 간다. 그게 정치의 누적된 결정이라고 한다면 화병이 생길 수 있다. 결국 허무주의로 또 빠진다. 누가 대구를 구원할 것인가.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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