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60810023215754

[박혜경의 사람학교] ‘아니오’라 말할 용기

2026-08-11 06:00
박혜경 한동대 교수

박혜경 한동대 교수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실업급여를 계산해 일하는 기간을 정한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퇴사 시점을 조율하고, 구직 활동의 최소 요건만 채운 뒤, 몇 달 치 급여로 여행을 계획한다는 말도 들린다. 씁쓸하지만 선뜻 나무라기도 어렵다. 제도가 허용하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복지는 중요하다.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제도는 공동체의 품격이다. 정치가 "드리겠다",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말을 자주 내놓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국민의 세금이며, 미래 세대가 함께 짊어질 몫이다. 세금은 남이 내고 혜택은 내가 받는다고 여기는 순간, 공동체를 떠받치는 신뢰는 조금씩 무너진다.


스위스에서 부러운 것은 풍광보다 국민의 태도다. 스위스 유권자들은 조건 없는 기본소득안, 법정 유급휴가 확대, 고액상속세 도입 같은 제안을 국민투표에서 잇달아 부결시켰다. 전국민 기본소득안에도 76.9%가 반대표를 던졌다. 주목할 점은 결과가 아니라, 명분과 비용, 장기적 파장까지 따져 물은 과정이었다. 달콤한 약속 뒤에 더 비싼 청구서가 숨어 있지 않은지 끝까지 확인한 것이다.


그 선택은 단순한 절제가 아니라 이성에 기반한 거절의 용기였다. 민주주의는 '예'를 많이 모으는 제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오'를 존중할 줄 아는 제도다. 시민은 달콤한 약속 앞에서도 묻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하고, 권력은 그 거절을 불편해하지 않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숙의가 없지 않았다. 2017년 신고리 5·6호기 논쟁에서 시민참여단은 학습과 토론 끝에 건설 재개를 권고하면서도, 원전 비중은 장기적으로 축소하자고 제안했다. 의견은 달랐지만 설득과 절차를 거쳤고, 정부는 그 결과대로 따랐다. 반면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를 둘러싼 논의는 달랐다. 국민 여론은 유지 61%, 폐지 23%로 나타났지만, 중대한 제도 변경에 걸맞은 설명과 사회적 숙의가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법안은 그런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한 채 국회를 통과했고, 8월4일 국무회의에서 공포안이 의결됐다. 국민은 결과보다 과정에서 먼저 신뢰를 잃는다. 묻고 묻지 않는 차이, 그 하나가 신뢰를 가른다.


국민이 책임 있게 '아니오'를 말할 분별력과 용기를 갖추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그 '아니오'가 권력의 귀에 닿는 일이다. 성숙한 시민은 달콤한 약속 앞에서 묻는다. 이 혜택은 어디서 오는가. 오늘의 결정이 내일의 부담으로 남지는 않는가. 권력도 물어야 한다. 우리가 듣지 못한 목소리는 없는가. 그 정책이 사람을 돕고 세우는가, 아니면 의존과 포기를 부추기는가.


좋은 나라는 좋은 국민만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국민의 '아니오'를 귀담아듣는 권력이 함께 자라야 한다. 가정과 학교, 사회는 아이들에게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과 분별을 가르쳐야 한다. 정치와 행정은 국민의 판단을 불편한 반대가 아니라 공동체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치가 국민을 속이는 것은 정치의 잘못이다. 그러나 깨어 있는 국민은 거듭 속지 않는다. 그런데도 속고 또 속는다면, 그때는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계산기를 두드리며 실업급여를 셈하던 청년에게도, 국민의 뜻을 묻지도 듣지도 않고 흘려버린 권력에도 '아니오'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권리에도, 권한에도 공동체를 향한 책임이 따른다고 말이다.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국민과 불편한 목소리를 듣는 권력이 함께할 때, 나라는 오래도록 선진국으로 남을 수 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정치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