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삶·윤동주의 하늘에서 출발
격자와 숫자·원소기호로 존재의 근원 탐색
지난 20일 윤선갤러리에서 만난 김미경 작가는 "이번 전시는 올해 제작한 작품을 비롯해 그동안 지속해 온 추상 작업들을 선보이는 자리"라고 말했다. 권혁준기자
사각 캔버스 안에서 은은한 빛이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참 바라보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던 색들이 화면 위로 떠오른다. 포근한 색감과 격자는 화면에 따뜻하고 차분한 질서를 더한다.
중견 작가 김미경의 개인전 '비추다/Mirrors Within'이 오는 11월10일까지 윤선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를 지성적으로 구획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인간의 숨결과 영혼의 원상으로 돌아가려는 신작과 기존 추상 작업을 선보인다.
지난 20일 윤선갤러리에서 만난 김 작가는 "2019년 2인전을 연 적은 있지만 대구에서 개인전을 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분들과 어떤 인연을 맺게 될지 기대되고 설렌다"고 말했다.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격자(grid) 작업은 어머니의 삶을 돌아본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했다.
김 작가는 "격자 작업은 1997년 뉴욕에서 공부하던 때 시작됐다"며 "어릴 때 살던 집에는 가구가 별로 없었다. 물건을 보자기에 싸 쌓아 놓았던 기억이 난다. 언제든 다시 이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보따리는 슬픔과 고통, 불안의 기억으로 남았다"고 말했다.
이어 "뉴욕에 살던 중 한국에 잠시 왔다가 인사동에서 조각보를 마주했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슬픔과 고통으로 기억하던 것이 아름답게 다가오는 데서 모순을 느꼈다"며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고, 그때부터 격자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격자를 채운 색은 수차례 쌓고 다듬어져 화면에 맑은 빛과 도자기 같은 깊이를 만든다.
김미경 작. 권혁준기자
김미경 작. 권혁준기자
김 작가는 "맑은 색을 얻기 위해 많은 색을 쌓는다. 표면은 맑고 고요하지만 그 아래에는 짙고 강렬한 색들이 있다"며 "지상의 삶에 발을 굳건히 딛고 저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대지의 색'을 올리고 샌딩한다. 그 위에 세상의 여러 색을 쌓아 마지막에는 '마음의 색'으로 마무리한다"고 말했다.
이어 "한복의 은은한 색과 창호지로 들어오는 햇빛, 백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며 "표면의 은은한 색은 아래에 쌓인 강렬한 색들을 품고 잡아준다. 짙은 색이 즉각적으로 주는 힘도 있지만, 은은한 색은 천천히 다가오는 대신 더 오래 머무는 색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전시장 한쪽 벽면의 문자와 숫자 작품도 눈길을 끈다. 멀리서는 작은 점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C·H·N·O와 숫자 1·2·3이 반복해서 쓰여 있다.
그는 "숫자 1·2·3은 어머니의 제한된 삶을 상징한다. 오로지 자식 셋만 알고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썼다"며 "무작위로 쓰기도 하고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 올리기도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어머니의 삶을 넘어 인간과 삶의 근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C·H·N·O는 생물과 무생물을 구성하는 주요 물질인 탄소·수소·질소·산소를 뜻한다"며 "인간의 기원과 근원을 생각하던 중 김상욱 물리학자의 책을 접했다. 개인적인 역사가 우주적인 서사와 만나는 느낌이었고, 작년부터 숫자와 함께 쓰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2016년부터 이어온 '윤동주의 하늘' 연작에는 우연히 찾은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인의 친필 원고와 사진, 시를 접하며 느낀 감정이 담겼다.
김 작가는 "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문학관 내부 공간을 지나 사방이 철판 벽으로 막힌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순간 '윤동주도 이 하늘을 보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제가 매일 보는 하늘과 윤동주가 보고 싶어 했을 하늘을 중첩시키고, 고려청자의 옥색도 함께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김미경 작. 권혁준기자
김미경 작. 권혁준기자
권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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