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순 전 경북대학교 초빙교수
교양(敎養)의 사전적 의미는 지식, 정서, 도덕 등을 바탕으로 길러진 고상하고 원만한 품성이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살펴보면 '가르쳐 기름'을 뜻한다. 독일에서는 교양을 '빌둥(Bildung)'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을 넘어, 사람 안에 어떤 형태(Bild)를 만들어 가는 과정, 즉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교양이란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인간다운 아름다움이자 품격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가 목도하는 교양의 현주소는 아쉬움을 남긴다. 교양의 진정한 뿌리인 '도덕적 감수성'과 '사회적 상식'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특히 눈앞의 사적 이익을 위해 최소한의 양심과 도덕마저 버리는 행태는 공동체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의 도덕적 해이는 단순히 개인의 성품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윤리적 수준을 퇴행시키고 있다. 영향력이 클수록, 공공의 상식을 체화하고 보여줄 책임은 더 크고 무겁다. 사적 편의나 이익에 따라 사회적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법과 질서를 무시할 때, 다수의 구성원이 힘들게 지켜온 교양의 척도와 공동체의 근간은 흔들리게 된다. 교양과 예절, 도덕과 윤리는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이를 잃어버린 사회는 공공의 신뢰를 상실하고 공동체를 약화한다.
첨단 기술이나 국가적 기밀이 해외로 유출되는 일도 적지 않다. 한 개인이 사욕을 위해 내버린 최소한의 교양과 도덕성은 기업과 공동체에 수천 배, 수만 배에 달하는 치명적 손실을 입히고, 나아가 국가 경쟁력과 사회적 신뢰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사회적 책무를 다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이들이 교양과 양심을 저버린 대가는 결국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가 되어 짊어지게 되는 셈이다. 사회는 수많은 관계의 연결망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땅히 청년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이들을 이끌어야 할 기성세대가 오히려 더 퇴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현실은 씁쓸함을 더한다.
프랑스의 현상학자 레비나스는 예절은 본래 불편한 타자를 전제로 한다고 말했다. 타자는 내가 마음대로 지배하거나 나의 기준에 맞출 수 없는 존재이며, 결코 나와 동일화될 수 없는 타자성을 지닌다. 타인이 존재하기에, 그리고 그로 인한 불편함이 수반되기에 우리에게는 역설적으로 예절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에게 편하고 익숙한 이들에게만 친절한 것이 단순한 본능이자 친목에 불과하다면, 진정한 예절과 윤리는 낯설고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그 타자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예절은 본질적으로 불편함을 견디는 힘이자 교양을 완성하는 실천적 덕목이다.
타인과 공동체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신의 욕망과 권위를 스스로 조율하는 절제야말로 예절의 출발점이자 교양의 실천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타인이나 공동체 앞에서 얼마큼 겸손해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욕망을 얼마나 절제하고 있는가. 돈과 권력을 무기 삼아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고 존엄을 손쉽게 저버리는 '교양 실종 사회'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양은 단순한 지식의 총합이 아니다.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겸손함이며, 자신의 이익과 권리가 타인의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하는 윤리적 자각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으로서의 교양과 품격을 만들어가는 '빌둥'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지위와 이익에 안주해 타인에 대한 예절을 잊어가고 있는가. 눈부신 성장이 찰나의 축제로 끝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사회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앞에 겸손해지며 나를 바라보는 타자와 공동체의 그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예절, 바로 교양의 품격을 되찾아야 한다.
진식
정치 담당 에디터(부국장)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