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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바다, 경주의 동해⑦] 신라의 종소리가 닿는 척사항

2026-10-16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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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울림 따라 걷는 가을 바닷길

성덕대왕신종이 울리고 항로 안내

골목 담장 길동무 물고기·바다거북

집집이 만드는 멸치젓·밥식해 소문

고운 모래와 몽돌 '오류고아라해변'

울창한 소나무 숲, 바다 조망 캠핑장

가을 바다에서는 귀가 먼저 깨어난다. 물가에서 부서지는 파도, 모래 위로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물의 숨결, 소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는 바람. 여름의 북적임이 잦아든 자리에 바다가 내는 소리들이 또렷해진다.


경주 감포의 작은 항구에는 그 소리들 사이로 신라의 울림을 떠올리게 하는 종이 걸려 있다. 절 마당도, 박물관도 아닌 바닷가 방파제 끝이다. 붉은 기둥이 종각처럼 종을 받치고, 그 너머로 동해가 펼쳐진다. 성덕대왕신종을 본뜬 '에밀레종 등대'. 신라의 종이 오늘의 바닷길을 지키는 자리에 와 있다.


배들이 정박한 포구 뒤로 낮은 지붕들이 모여 있고, 가까이에는 오류고아라해변과 소나무숲, 캠핑장이 이어진다. 마을로 들어서면 담장 속 물고기와 바다거북이 골목의 길동무가 된다. 방파제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해변의 솔숲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같은 바다가 조금씩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곳, 척사항이다.


경주시 감포읍 오류2리에 자리한 척사항. 어선들이 정박한 포구 뒤로 낮은 지붕들이 모여 있다. 길게 펼쳐진 백사장이 비단을 펼쳐 자로 잰 듯하다고 해서 붙었다는 척사의 이름이 항구와 마을에 남아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경주시 감포읍 오류2리에 자리한 척사항. 어선들이 정박한 포구 뒤로 낮은 지붕들이 모여 있다. 길게 펼쳐진 백사장이 비단을 펼쳐 자로 잰 듯하다고 해서 붙었다는 '척사'의 이름이 항구와 마을에 남아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그 바다를 오래 바라본 사람들은 모래밭의 생김새를 마을 이름으로 남겼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이름으로 배를 띄우고, 미역을 건져 올리며 살아간다. 척사는 종을 품은 항구이면서, 옛 해변의 이름으로 오늘의 바다를 살아가는 마을이다.


경주 척사항 방파제 등대. 등대 중심에 성덕대왕신종을 형상화한 종 모양 조형물이 있다. 붉은 기둥이 종각을 이루고, 그 안에는 비천상을 재현한 성덕대왕신종 조형물이 걸려 있다. 어민들의 풍어와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늘의 바닷길을 밝힌다.

경주 척사항 방파제 등대. 등대 중심에 성덕대왕신종을 형상화한 종 모양 조형물이 있다. 붉은 기둥이 종각을 이루고, 그 안에는 비천상을 재현한 성덕대왕신종 조형물이 걸려 있다. 어민들의 풍어와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오늘의 바닷길을 밝힌다.

경주 척사항방파제등대. 등대 중심에 성덕대왕신종을 형상화한 종 모양 조형물이 있다. 
에밀레종 등대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경주 척사항방파제등대. 등대 중심에 성덕대왕신종을 형상화한 종 모양 조형물이 있다. '에밀레종 등대'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바닷길을 지키는 신라의 종


감포항 북쪽의 척사항은 바다와 집들이 가까운 포구다. 낮은 지붕들이 모여 있는 골목을 빠져나오면 곧 배들이 머무는 물가다. 방파제 안쪽에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고, 바깥으로는 바위와 물결이 이어진다. 넓은 바다를 앞에 두고도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배와 집 사이의 짧은 거리다. 바다를 일터로 삼은 마을의 모양이 그 안에 있다.


이곳의 행정주소는 경주시 감포읍 오류2리. 그러나 항구와 마을에는 척사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항구는 척사항, 마을은 척사마을, 어민들의 공동체는 척사 어촌계로 불린다.


'척사(尺紗)'라는 이름은 백사장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길게 펼쳐진 모래밭이 비단을 펼쳐 자로 잰 듯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긴 모래밭을 뜻하는 장사(長沙)라는 이름도 전해진다.


지금의 '오류'는 여러 마을을 묶는 지명이다. 1914년 오류와 연동, 척사를 합쳐 오류리로 정했는데, 옛날 해변 서쪽 골짜기에 큰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자랐다고 해서 '오류(五柳)'라 불렸다고 한다. 골짜기의 버드나무와 바닷가의 모래밭. 지금은 하나의 법정리에 속하지만 마을마다 제 풍경에서 얻은 이름이 따로 있었다.


북방파제를 따라가면 그 끝에 붉은 등대가 하나 서 있다. 멀리서는 푸른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선명한 그 붉은색이 먼저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기둥 사이에 매달린 종이 더욱 존재감을 발휘한다. 등대의 붉은 기둥이 종각처럼 종을 받치고, 종의 표면에는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을 본뜬 조형물이다.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고, 혜공왕이 그 뜻을 이어 771년 완성한 성덕대왕신종을 이곳 바다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일까, 정식 명칭인 척사항북방파제등대라는 이름보다 '에밀레종 등대'라는 별칭으로 더 알려져 있다. 낮 12시와 오후 6시에는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를 재현한 음원이 울리고, 밤에는 5초 간격으로 붉은 불빛을 보내 선박의 길을 안내한다고 한다.


오래된 종의 형상이 오늘의 항구에서 품은 바람은 구체적이다. 바다로 나간 배가 무사히 돌아오고, 그 배를 기다리던 집에 다시 하루가 이어지는 일이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등대의 비천상을 보고 있다가 몸을 돌리면 걸어올 때와 다른 풍경이 열린다. 포구 안, 배를 단단히 붙잡은 밧줄과 선체 뒤로 집들이 겹쳐 보인다. 저 배들은 무엇을 잡으러 나갈까. 저 집에서는 어느 창으로 포구가 보일까. 풍경 안쪽의 생활이 궁금해졌다.


경주 척사마을은 바다와 집들이 가까이 맞닿은 어촌이다. 주민들은 배를 띄우고 미역과 전복, 해삼, 소라 등을 채취하며 바다에서 생활을 이어간다.

경주 척사마을은 바다와 집들이 가까이 맞닿은 어촌이다. 주민들은 배를 띄우고 미역과 전복, 해삼, 소라 등을 채취하며 바다에서 생활을 이어간다.

◆가을 바다에서 다음 봄을 준비하는 사람들


방파제에서 바라보던 집들 사이로 들어섰다. 척사마을의 담장에는 물고기와 바다거북이 그려져 있다. 포구에서 만난 바다가 골목 안으로 들어와 벽을 따라 흐른다. 그림을 따라 몇 걸음 옮기면 길이 꺾이고, 담장 위로 낮은 지붕과 전깃줄이 이어진다.


같은 바다라도 그 안에서 나는 것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척사의 어선들이 예전에는 통발로 문어를 많이 잡았지만, 해수온도 상승으로 문어가 귀해지면서 최근에는 삼치잡이로 옮겨가고 있다고 했다. 근해로 나가 대게나 참가자미를 잡는 배들도 있다.


척사 어촌계는 전복과 미역, 해삼과 소라 등을 채취한다. 특히 '척사 자연산 돌미역'은 마을의 이름을 걸고 내놓는 먹거리다. 감포 앞바다의 거센 파도를 견디며 자라 줄기가 굵다.


이맘때면 마을 해녀들의 1년 농사가 시작되는 계절이다. 감포를 비롯한 동해안에서는 가을부터 초겨울 사이 미역이 자랄 바위를 닦는다. 바위에 붙은 다른 해조류 등을 걷어내 포자가 자리 잡을 터를 마련하는 '기세(磯洗)' 작업은 돌매기, 짬매기라고도 하는데 육지에서 밭을 매듯 바닷속 미역밭을 매는 셈이다.


봄에 건져 올려 해풍에 말릴 돌미역에는 앞선 가을의 손길이 담긴다. 수확하는 모습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바다의 일이다. 바다는 오랫동안 갯마을 어머니들의 일터였고, 어머니들은 그 품에서 건져올린 것으로 자식들을 길러냈다.


경주 척사마을의 담장에는 물고기와 바다거북이 그려져 있다. 포구에서 만난 바다가 골목 안으로 들어와 벽을 따라 흐른다.

경주 척사마을의 담장에는 물고기와 바다거북이 그려져 있다. 포구에서 만난 바다가 골목 안으로 들어와 벽을 따라 흐른다.

경주 척사항에 있는 척사어촌계 건물. 척사 어촌계는 전복과 미역, 해삼과 소라 등을 채취한다. 특히 척사 자연산 돌미역은 마을의 이름을 걸고 내놓는 먹거리다. 감포 앞바다의 거센 파도를 견디며 자라 줄기가 굵다.

경주 척사항에 있는 척사어촌계 건물. 척사 어촌계는 전복과 미역, 해삼과 소라 등을 채취한다. 특히 '척사 자연산 돌미역'은 마을의 이름을 걸고 내놓는 먹거리다. 감포 앞바다의 거센 파도를 견디며 자라 줄기가 굵다.

바람이 잘 통하는 해변 쪽에서는 생선 몇 마리가 가을볕에 몸을 말리고 있었다. 담장에 그려진 물고기를 따라 걷다가, 문득 이 집들의 밥상에도 바다가 오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 두고 먹으려고 집집이 담그던 멸치젓과 밥식해에도 그런 생활이 담겨 있다. 맛있기로 소문이 나서 주민들은 친지들과 나누기도 하고 알음알음 그 맛을 알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팔기도 한다.


이제는 해녀들이 고령화돼서 미역과 전복의 채취량은 예전만 못하지만, 대신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이 많아졌다. 바다에서 먹거리를 얻어온 터전이 이제는 낯선 이들에게 쉬어갈 시간을 내어주는 셈이다.


마을과 항구도 최근 몇 년 사이 새롭게 정비됐다. 2024년 시작된 어촌뉴딜300사업으로 방파제를 보강하고 항구 바닥을 준설했다.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오고, 입구의 수심이 얕아 배가 드나들기 어려웠던 문제가 덕분에 한결 나아졌다. 해변길의 보행 공간과 마을회관, 어촌계회관도 정비했다. 여행자가 걷기 좋아진 길과 어민이 배를 대기 편해진 항구가 함께 마련됐다.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포구를 보면 처음과는 조금 다른 바다가 된다. 집집마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을 갈무리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하루가 있다. 종을 품은 등대가 지키는 것도 그 하루일 것이다.


약 1㎞의 백사장 뒤로 소나무숲이 이어지는 오류고아라해변. 고운 모래밭과 둥근 몽돌이 놓인 물가가 걸음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약 1㎞의 백사장 뒤로 소나무숲이 이어지는 오류고아라해변. 고운 모래밭과 둥근 몽돌이 놓인 물가가 걸음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오류고아라해변, 솔숲에서 즐기는 캠핑


척사항에서 북쪽으로 난 해변길을 따라 걷는다. 척사의 해안길과 함께 어촌뉴딜사업으로 정비된 고아라 해변길이다. 길 끝에서 솔숲을 등진 모래밭이 열린다. 한동안 오류해수욕장으로 불리던 이곳은 2011년 오류고아라해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운 모래의 이미지를 살린 해변 이름이다. 척사와 고아라, 서로 다른 때에 붙은 이름이지만, 둘 다 이 바닷가의 고운 모래에서 왔다.


1㎞에 이르는 해변은 걸을수록 표정이 바뀐다. 발이 폭신하게 묻히는 모래밭이 이어지다가 둥근 몽돌이 깔린 자리가 나타난다. 모래가 고와 여름이면 모래찜질을 하러 오는 이들로 붐비고, 수심도 1.5m 안팎으로 완만하다. 해변 한쪽으로는 민물이 흘러들어 바다와 만난다. 피서객이 떠난 가을의 해변은 한결 고요하다. 신발을 벗어 들고 물가를 걸어도 좋고, 파도가 밀려왔다 물러나는 간격을 가만히 세어봐도 좋다. 물에 뛰어들지 않아도 바다는 충분히 가깝다.


파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몇 걸음 옮기다가 멈추면 바다는 먼저 갔다가 이내 되돌아온다. 서둘러 따라갈 필요가 없는 걸음이다. 느릿느릿 걸으며,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캠핑장을 만났다.


모래밭 뒤 소나무숲 안에는 오류캠핑장이 있다. 텐트를 챙겨 오는 사람도, 카라반에 짐을 푸는 사람도 같은 솔숲에 자리를 잡는다. 오랜 세월 바닷바람을 맞으며 저마다의 모양을 얻은 소나무들이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가 하면, 하늘을 향해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늘을 내어주기도 한다. 카라반과 그 앞의 테이블은 숲을 밀어내지 않고 나무 사이에 들어앉아 있다. 처마 대신 솔가지가 하늘을 가리고, 가지 사이로 바다가 조각조각 열린다. 바닷가 숙소를 고를 때 흔히 따지는 '전망'이 여기서는 무색해진다. 의자를 놓는 자리마다 저마다의 바다가 열린다.


오류고아라해변의 솔숲에 조성된 오류캠핑장은 경주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공공캠핑장이다. 나무 사이에 카라반과 야영 공간이 자리해 소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가까운 해변으로 나갈 수 있다.

오류고아라해변의 솔숲에 조성된 오류캠핑장은 경주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공공캠핑장이다. 나무 사이에 카라반과 야영 공간이 자리해 소나무 그늘에서 쉬다가 가까운 해변으로 나갈 수 있다.

이곳에 캠핑 의자를 놓고, 솔가지 사이를 지나는 바람을 느끼며 소나무 그림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척사항의 에밀레종 등대가 불을 밝히는 시간을 기다렸다.


신라의 종을 품은 붉은 등대, 마을 담장 위를 헤엄치던 바다거북, 다음 봄을 위해 바위를 닦는 손, 가을볕에 몸을 말리던 생선, 비단을 펼친 듯한 모래사장…. 솔숲에 앉아 지나온 길을 되짚는다. 짧은 해변길에서 만난 풍경마다 이곳 사람들이 바다와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었다.


왕릉과 절터에서 만난 경주의 천년은 이 바닷가에서 오늘의 하루로 이어진다. 배를 띄우고, 미역밭을 돌보고, 돌아온 이들과 밥상을 나누는 하루. 그 곁에 여행자도 잠시 자리를 얻는다.


솔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물러난다. 귀를 기울이면, 가을 바다는 아직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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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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