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유시인(音流示人). 음악을 흘려 당신을 봅니다. 음악이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소리 너머에 있는 인간의 감정과 시대를 살펴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털벌레 보로'. <스튜디오 지브리 제공>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업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에는 오래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단편 '털벌레 보로'를 만들며, 그가 처음으로 컴퓨터 그래픽(CG)을 작품의 중심에 놓았던 무렵이다. 막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동작은 매끄러웠고, 기술적으로도 특별히 어색한 데가 없었다. 보는 이 대부분은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니터 앞의 노감독은 고개를 젓는다. 저건 아이가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니라고.
그가 붙든 것은 도구의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애니메이터들이 만든 애벌레의 움직임은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다만 그 애벌레는 이미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너무 어른스럽다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빠르고 능숙하게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애벌레는 방금 세상과 마주했다. 눈앞의 빛도, 나뭇잎도, 공기의 움직임도 모두 처음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벌레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낯선 세계를 더듬듯 바라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차이를 알아보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금 그리고 있는 존재가 세상을 처음 보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기가 난생처음 무언가를 마주할 때 눈과 목과 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는 것이다. 이것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지식일까. 그보다는 매사를 유심히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이 관찰로 체득하는 '감각'에 가깝다.
필자 역시 다큐멘터리를 보지 않았다면 그 장면에서 아무런 의문도 품지 못했을 것이다. 장면을 만든 제작진에게도 충분히 완성도 있는 시안이었을 터다. 감각이 무뎌서가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관심과 직업, 경험에 따라 세상의 서로 다른 부분을 볼 뿐이다. 같은 집을 두고도 목수는 나무의 이음과 마감을 보고, 건축가는 구조와 미학을 읽으며,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빛과 색, 공간의 흐름을 살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갓 태어난 생명이 세상을 바라보는 속도까지 보는 사람인 것이다.
자신만 알아볼지도 모르는 차이를 위해 창작자가 애를 쓰는 이유는 보여주기 위해서다. <게티이미지뱅크>
창작자로서 이 일화에 깊이 공감하는 까닭은 그 태도에 있다. 다른 사람은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차이라 해도, 자신이 보고 생각한 바를 작품 안에 분명하고 온전하게 담아내려는 태도다. 청중에게 닿는 것은 창작 과정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작품 자체다. 창작자가 바라본 세계의 최종 답안은 자신의 이름으로 내놓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본 것과 믿는 것을 작품에 온전히 쏟아 넣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작곡가가 음 하나의 선택과 길이, 쉼표 하나의 위치를 두고 며칠씩 고민하는 것도 자신의 의도와 작품의 뜻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자기만 알아볼지도 모르는 차이를 위해 창작자는 왜 애를 쓰는가. 보여주기 위해서다. 자신이 먼저 발견한 차이를 다른 사람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갓 태어난 아이의 눈이 어른의 눈과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애벌레의 움직임을 통해 그 차이를 직접 느끼게 한다. 관객은 그의 시선을 빌려, 이전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것을 비로소 발견한다. 한 사람의 시선이 다른 사람의 감각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를 한 번쯤 보기를 권한다. 완성된 작품만 보아서는 애벌레의 짧은 고갯짓에 '갓 태어난 생명이 처음 세상을 바라보는 놀라움'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쉽지 않다. 그러나 창작자의 시선을 알고 나면 작품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일상도 전과 다르게 보인다.
천장의 모빌을 따라가는 아이의 눈, 낯선 곳에 내려앉아 한동안 주변을 살피는 작은 새, 햇빛 쪽으로 기울어진 새잎, 같은 바람 속에서도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흔들리는 풀잎. 그저 지나쳤던 움직임에도 특별함이 있음을 깨닫고, 주변을 오래 바라보게 된다. 창작자가 먼저 읽어낸 세계를 작품으로 건네받으며, 우리는 익숙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음악은 익숙함에서 출발해 설득력 있는 새로움에 닿아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벌레의 고갯짓 하나를 두고 고집을 꺾지 않았듯 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다만 음악은 추상적이어서 한층 까다롭다. 음악은 애벌레의 눈도, 흔들리는 풀잎도 보여주지 않는다. 형상도 문장도 없이 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떻게 세상을 새롭게 들려줄 수 있을까. 빈 오선지 앞에서 맨 처음 떠오르는 소리는 대개 이미 어디선가 들어본 소리다. 오랫동안 듣고 익혀온 음악의 문법이 다음에 올 소리를 불러온다. 그 익숙함은 편안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무엇보다 자연스럽다. 어른처럼 고개를 돌리던 애벌레의 움직임이 매끄러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받아 적지 않으려 한다. 몸에 밴 감각이 먼저 고른 화음을 의심하고, 익숙하게 이어지는 선율을 달리 생각하고, 때로는 과하다 싶을 만큼 비틀어 본다. 물론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낯설기만 한 소리는 기이함으로 끝나기 쉽고, 익숙하기만 한 소리는 청중의 귀를 새롭게 열어주지 못한다. 익숙함은 청중이 작품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다. 작곡가로서 필자가 바라는 것은 그렇게 문을 지나온 사람이 이전에 듣지 못한 무언가와 마주하게 하는 일이다. 낯선 소리가 '이상하다'에서 그치지 않고 '이럴 수도 있었구나'로 들리도록, 음악은 익숙함에서 출발해 설득력 있는 새로움에 닿아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벌레의 고갯짓 하나를 두고 고집을 꺾지 않았듯, 이것은 필자에게도 끝내 타협할 수 없는 창작의 원칙이다.
작곡가가 작품을 끝까지 다듬는 까닭은, 작품이 듣는 이의 시간 속에서 경험되기 때문이다. 10분짜리 음악이 흐르는 동안 듣는 이의 삶에서도 10분이 흐른다. 필자는 그 사실을 생각하며, 자신이 발견한 것을 작품에 온전히 담고 그 소리가 듣는 이에게 충분히 가닿도록 살핀다.
현대인의 일상은 무엇 하나 오래 바라보거나 들을 틈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출근길의 하늘은 휴대전화 화면에 가려지고, 계절이 바뀌는 소리는 이어폰 너머로 지나간다. 바람이나 나뭇잎을 오래 바라볼 여유가 사라진 삶에서, 음악 한 곡을 듣는 시간은 몇 남지 않은 틈일지 모른다. 그 틈에 누군가 필자의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 시간이 무심히 흘러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안다고 여기는 익숙한 일상에서 미처 듣지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상을 잠시 다르게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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