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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없는 도시] 시신 못 찾고 제삿날도 몰라…트라우마 속 살아온 유족들의 고백

2026-10-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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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10월항쟁 유족 조경호씨. 초등학교 4학년 때 10월항쟁을 목격했고 이후 아버지를 여의었다. 조경호씨 제공

영천 10월항쟁 유족 조경호씨. 초등학교 4학년 때 10월항쟁을 목격했고 이후 아버지를 여의었다. 조경호씨 제공

"영천군수가 죽어 있는 걸 본 게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1946년 10월3일 아침 학교에 가는 길이었는데 하수구에 쓰러져 있더라고. 어려서 뭣도 몰랐지만 그 험한 꼴을 봤기 때문에 나도 험한 꼴을 당하고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신 게 아닌가…. 긴 세월 힘들게 살아오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겁니다."(영천 10월항쟁 유족 조경호씨)


1946년 10월항쟁 이후 항쟁 관련자와 유족들은 민간인 학살과 '빨갱이' 낙인찍기 문화로 수십년간 피해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연좌제 폐지와 민주화가 이뤄지며 비로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지만 항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트라우마로 가족사를 이야기하기 꺼리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영남일보는 어렵게 입을 연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이들의 삶과 구체적인 피해 실태를 들었다.


◆군경 피해 산골로 숨고 온 가족이 몰살


경북 영천 출신 조경호(92)씨가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이에 목격한 참상은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된 10월항쟁은 경북 곳곳으로 확산했다. 그중에서도 영천은 항쟁이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었다. 10월2일 밤부터 시작해 10월5일까지 이어졌는데, 학계에서는 친일파·지주·관리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민이 항쟁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던 영천에서는 행정당국과 농민, 지주와 소작농의 갈등이 특히 심했다. 이태수 영천군수가 직접 나서 미곡수집령을 위반할 경우 엄벌에 처하겠다고 주민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논농사에서 소작률이 60%에 이를 만큼 대지주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있었다. 영천 10월항쟁을 조사해온 이중기 시인은 "영천은 농민 착취가 가혹했다. 군 직원과 경찰이 마을을 돌며 공출(쌀 강제 수매)하지 않은 집이 있으면 모두 모이라고 해 두 명씩 마주 보고 서로 귀를 잡고 뺨을 때리도록 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여기에 대구와 가까운 지리적 요건으로 대구에서 시작된 항쟁이 빠르게 번졌다. 군중은 3일 새벽부터 군청, 경찰서 등을 점거했다. 이때 농민의 원한을 샀던 이태수 군수가 군중의 몽둥이에 맞아 사망했다. 화북면 구전동(현 화남면 구전리)에 살던 조씨는 군수가 쓰러져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항쟁이 격렬하게 일어났기에 이후의 탄압도 가혹했다. 조씨는 항쟁 직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경찰이 항쟁 참가자는 물론 마을 유지들도 잡아갔어요. 지서(支署) 옆 땅바닥에 20~30명씩 굴려놓고 두들겨 팼지요. 그렇게 맞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깨도 다리도 쓰지를 못했어요. 아버지도 그 대상이 됐습니다. 하루는 가족들이 군위쪽 산골에 숨어 있다는 얘길 듣고 찾아갔는데 경찰이 뒤따라와 밤중에 나를 습격했어요. 그땐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까 아버지는 커서 정치학이나 인문학쪽은 절대 공부할 생각 마라 하시고…."


항쟁에 참여한 그의 아버지 고(故) 조희림씨는 이후 피신 다니다 1948년 '남로당 야산대 토벌' 때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막내 삼촌과 고모도 이때부터 소식이 끊겼다. 조씨는 고려대 화학과를 나와 제지회사에서 일하다 퇴직하고, 지금은 경기 용인에 홀몸으로 남아 요양원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항상 고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이제 눈물도 다 말랐습니다. 아흔 넘어 혼자 밥 해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서 요양원을 알아보고 짐 정리하고 있는데 이것도 쉽지 않네요."


고(故) 황보금씨의 아들 황보홍씨. 그의 선친은 1947~1949년 사이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연행돼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희기자

고(故) 황보금씨의 아들 황보홍씨. 그의 선친은 1947~1949년 사이 서북청년단으로부터 연행돼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현희기자

같은 동네(영천 구전동)에서 태어난 황보홍(81)씨의 집안도 여파를 피하지 못했다. 황보가에서 좌익 운동과 10월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집안 자체가 몰살당했다. 황보씨의 외가까지 합하면 그가 아는 희생자만 6명이다. 당시 구전동이 황보씨 집성촌이었기에 마을도 '빨갱이 마을'로 불렸다.


황보홍씨의 아버지 고(故) 황보금씨는 9남매 중 막내아들이었다. 민성일보 편집장이자 남로당 경북도당 선전부장이었던 둘째 형 황보집씨를 따라 10월항쟁에 참여했다. 이후 서북청년단(미군정 시기 조직된 우익 청년단체) 등을 피해 도피 생활을 했는데, 청년단은 수시로 집에 찾아와 그의 행방을 물었다. 황보홍씨는 "어머니에게 총구를 들이밀고 구타해 어머니의 이빨이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1947년에서 1949년 사이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희생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시신도 수습되지 못했다"고 통탄스러워했다. 남은 가족들은 매년 음력 9월9일에 제사를 지낸다. 고인의 죽은 날을 알 수 없는 경우 이날 제사를 지내는 풍습에 따른 것이다.


대구 동구에 거주 중인 10월항쟁 유족 이영수씨. 어릴 적 이씨에게 아버지 이야기는 금기시됐다. 조현희기자

대구 동구에 거주 중인 10월항쟁 유족 이영수씨. 어릴 적 이씨에게 아버지 이야기는 금기시됐다. 조현희기자

◆공직은 꿈도 못 꿔…부녀자들은 성폭력 겪기도


여성 유족들의 고통도 가족을 잃은 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을 잃은 부인들은 가난과 사회적 낙인 속에서 자녀들을 홀로 키워야 했다. 군경에게 구타는 물론 성폭력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연좌제의 굴레로 가족의 과거를 숨기고, 자녀들 역시 편견과 불이익을 겪으며 지냈다.


대구 동구에 거주 중인 유족 이영수(78)씨는 "어릴 때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셨다는 것만 들었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밖에서 아버지 얘길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제가 딸인 만큼 어머니가 저를 정말 엄하게 키우셨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에게 '빨간 줄'이 남아 있으니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공무원은 될 수 없다는 말도 주변에서 자주 들었다"고 했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 초대 회장의 아버지 고(故) 채병기(오른쪽)씨와 어머니. 채영희씨 제공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 초대 회장의 아버지 고(故) 채병기(오른쪽)씨와 어머니. 채영희씨 제공

10월항쟁유족회 초대 회장을 지낸 채영희(82)씨는 '시월의 딸'로 불릴 만큼 10월항쟁의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서 왔다. 오랜 시간 유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애써왔지만 자신의 가족사를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돌아가셨는데도 경찰들은 아버지가 북한으로 갔다고 하면서 수시로 집을 드나들었어요. 열여덟살에 경찰로부터 폭력을 당했는데 엄마와 고모가 절대 그 사람 이름을 알려 하지 말랬어요. 너 하나쯤은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할,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엄마, 고모는 내가 나쁜 생각을 할까 봐 걱정했지만 나는 엄마가 당하는 걸 목격했을 때 이걸 어쩌면 좋지 하면서 잊어버리려 하고…."


채씨의 집안 미대동 인천채씨 문중은 3·1운동 당시 대구유림 중 마을 단위로 유일하게 만세운동에 참여한 곳이다. 그의 조부 고(故) 채충식 선생은 독립운동과 관련해 숱한 옥고를 치르고, 아버지 고(故) 채병기씨는 대구 10월항쟁에 참여해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됐다. 선친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가 한국전쟁 시기 가창골에 끌려가 죽음을 맞았다.


10월항쟁을 조사한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경찰이 적법한 절차 없이 민간인을 희생시킨 사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을 권고했다. 그러나 강제력이 없어 후속 조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사회적 낙인을 우려해 진실규명 신청조차 하지 못한 이들도 상당수다. 유족회의 지속적인 요구로 대구시는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2016년 제정하고 위령제 예산을 지원해왔지만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은 미흡하다(영남일보 10월1일자 5면 보도).


채씨는 10월항쟁이 올해 80주년을 맞은 만큼 역사를 제대로 알리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밖에 나가면 '빨갱이'라 했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 나라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아우슈비츠는 가르치는데 정작 한반도에서 일어난 10월항쟁은 가르치지 않고 있어요. 국가폭력과 관련한 트라우마센터도 대구에 없어 광주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까지 가는 유족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 초대 회장. 그의 아버지 고(故) 채병기씨는 대구 10월항쟁에 참여했다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됐다. 조현희기자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 초대 회장. 그의 아버지 고(故) 채병기씨는 대구 10월항쟁에 참여했다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됐다. 조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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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현실적 낭만주의자. 용기와 진실을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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