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논설위원.
#젠슨 황과 이건희="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그의 아들을 도와서라도 갚겠다." 젠슨 황은 유독 이재용을 지극히 챙긴다. 시대를 앞서간 젠슨 황은 창업 초기 너무 많은 게임용 그래픽카드를 만들어버렸다. 쌓인 재고로 파산 직전까지 갔다. 그때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 이건희 삼성 회장이었다. "나에게는 대한민국을 위한 세 가지 비전이 있다. 모든 가정에 초고속 인터넷을 연결하는 것, 그래서 정보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비디오게임을 핵심 엔진으로 보고 언젠가 게임올림픽을 여는 것"이라 적혀있었다. 그때가 1996년, 개인이 각자 컴퓨터를 가지고 게임을 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 하던 시기였다. 편지에 감동한 젠슨 황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용산 전자 상가에서 직접 영업을 뛰며 이건희가 말한 '그때'를 준비했다. 정확히 2년 뒤 한국에서 PC방 대호황과 게임 붐 시대가 열렸다. 그래픽카드는 불티나게 팔렸고 쓰러져가던 엔비디아는 벌떡 일어섰다. 젠슨 황은 작년 한 행사에서 이건희의 편지를 직접 공개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아들 이재용 옆에서 그 고마움을 갚아가고 있다. 이 이야기를 길게 소개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논란의 한미동맹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축복과 저주 사이=조선이 '미리견(彌利堅·미국)'을 처음 접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 후 160년, 한미관계는 애증이 교차했지만 대체로 축복의 시간이었다. GNI 67달러에 불과하던 최빈국이 4만 달러를 넘긴 인구 5천만 이상 국가 중 여섯 번째, 경상수지 흑자는 일본과 독일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나라가 됐다. 기적은 미국과의 동맹 효과를 빼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잊어서는 안 될 빚이다. 그런데 갑자기 "앞으로 20~30년을 본다면 (한미동맹이) 축복이 아니고 저주가 될 수 있다"라고 한다. 논란의 당사자는 문정인(문재인정부 통일외교안보특보). 미·중 패권 경쟁 속에 한국이 중국 견제의 최전방 기지로 활용될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때 '방기(放棄)의 위험'이 두려웠다면 지금은 '연루(連累)의 위험'에 직면한 게 사실이다.
#트럼프 참패=샤이 트럼프는 없었다. 앵그리 트럼프만 있었다. 보수의 심장 텍사스주(州) 사수를 위해 일론 머스크가 6천억 원을 쏟아부었지만 헛수고였고, 100년 철옹성 캔자스마저 뺏겼다. 유럽이 도리어 긴장하고 있다. 패배의 화풀이로 보복당할까 봐 그렇다. 일본도 비슷하다. 동맹을 믿고 싸워온 북·중·러와 미국이 밀착하는 국면이 최악의 시나리오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만만한 동맹부터 때려잡는 트럼프의 악벽(惡癖)이 재발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런 미국에 지난 시간의 빚을 어찌 갚아야 할까. 혼란스럽다. 젠슨 황과 이건희·이재용 간 아름다운 '보은(報恩)'의 이야기로 시작된 반도체 협력은 AI혁명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기업 간 협력이 기술 동맹의 가능성을 넓히는 동안, 국가 간 동맹은 위기에 직면했다. 희생양의 피를 마시며 굳게 약속하던 '삽혈동맹(歃血同盟)'은 박제된 옛 의식일 뿐이다. 미국이 트럼프를 심판했다. 트럼프를 향한 분노가 미국을 덮쳤다. 이제 동맹의 차례다. 관세와 안보 위협, 전쟁의 공포에 시달려온 동맹들이 과연 판을 뒤집을 수 있을까.
국내정치도 움직인다. 보수논객 조갑제의 평(評)이 발군이다. "트럼프 맹종 한국 극우파도 오늘 초상집 분위기"라 했다. 'STOP THE STEAL 세력'의 종말을 예고했다. 트럼프를 수장으로 하는 소위 '국제 음모론 연대'도 무너질까. 트럼프 참패 이후의 세상이 흥미진진하다.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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