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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55] 제2부 中國속의 경상도를 찾아서

2004-06-07

영남출신 50만명…당당한 조선족 주류
일제초기 정치적 망명 성격
1930년 전후 농민 대량 이주
내륙으로 진출 쌀농사 전파

[마을 .55] 제2부 中國속의 경상도를 찾아서
이주 초기 조선족 개간민

'제 나라 잃고 제 땅 떼우고/ 가노라 간다, 주림에 밀려/ 가노라 간다, 총칼에 ?겨/ 이고지고 고달픈 흰옷의 무리/ 깨여진 쪽박에는 꿈이 서럽고/ 괴나리 보짐에는 한이 무거워/ 타관의 고개마루 해저무는데/ 바람 찬 이 밤은 어데서 묵노' (조용남의 '이민행렬'중에서)

중국에는 우리핏줄인 조선족이 산다. 200만명이나. 이는 우리 모두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렇다면 그 중에 경상도 출신은 얼마나 되며, 그들은 언제 어떤 연유로 이역만리 먼 길을 떠났을까. 또 그들은 어떻게 산 설고 물 설은 타국땅을 개척해 가장 우수한 소수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한국이라는 모국은 그들에게 지금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물음은 결국 '중국속의 경상도 마을'이라는 기획취재로 이어졌다. 영남일보는 이 시리즈를 앞으로 매주 1회씩 20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편집자 주>

① 이주역사

지난 4월 하순부터 35일간 중국의 동북 3성과 내몽골자치구를 돌며 경상도 마을을 찾아다닌 취재 결과와 현지 조선족 학자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확인한 경상도 출신 조선족의 수는 무려 50만명. 당초 취재팀이 어림짐작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은 수치였다. 당연히 함경도와 평안도가 조선족 사회의 주류일 것이라는 상식이 무너질 정도로 원적지가 경상도인 조선족의 비중이 높았다.

조선족의 최초 중국이주시기는 19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스로 고구려인의 후손이라고 알고 있는 한족들도 있고, 청나라 초기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출병했다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박씨 성을 이어오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박가촌(이들 중 일부는 조선족으로 민족분류가 돼 있다)도 있고, 원나라 말기에 이주한 성주이씨 후손들의 마을도 이번 취재과정에서 발굴됐지만 이들은 이미 언어 등의 민족성을 상실한 채 한족에 동화된 상태여서 제외하는 것.

본격적인 만주이민이 시작된 것은 1845년 청과 조선이 간도 등 변경 일대에 대한 봉금정책을 완화하면서부터. 그 이후인 1860~1870년 함경도 일대에 미증유의 자연재해가 거듭되면서 기아에 허덕이는 조선의 농민들이 줄지어 강을 넘게 된다.

이같은 조선인의 간도 이주는 청나라가 러시아와 맺은 애훈조약과 북경조약 탓에 흑룡강 이북과 우수리강 이동 지역 100만㎢의 땅을 상실하면서 국경을 지키기 위해 변방군을 설치하고 봉금정책을 해제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청나라는 한술 더 떠 1866년 두만강 이북의 700리, 너비 45리의 땅을 조선 이민들의 독점개간구역으로 선포하는 등의 적극적인 이민 유인정책을 폈다. 이에따라 두만강 북쪽의 간도지역과 압록강 북쪽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인구는 1904년 당시의 허술한 통계로도 10만명을 바라보게 된다.

경상도민들의 이주는 이보다 다소 늦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됐다. 일본 외무성의 '재만 조선인 개황'에 따르면 1894년 당시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 6만5천명 가운데 원적지가 경북인 사람이 1천300명, 경남이 1천200명이었다. 물론 전체 이주자의 90%이상이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으로 청나라와 국경을 접한 이들 두지역 출신이 당시 이주행렬의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이틈에서도 전체 이주민의 3.84%가 경상도 출신이었던 셈이다. 경상도 출신 이주자들의 수는 1904년 경북 1천800명, 경남 1천700명 등 3천500명으로 늘어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소규모의 자발적 이민이 대부분인 것으로 파악된다.

경상도 출신들의 본격적인 만주이민은 1910년의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뤄진다. 1905년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다음 항일의병 투쟁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으나 일본의 무력에 의해 진압되고, 나라마저 빼앗기게 되자 다른 지역 애국지사들과 마찬가지로 경상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도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기게 된다. 이들이 초창기에 항일기지로 삼은 곳은 현재의 길림성 유하현과 통하현 일대. 안동 출신의 석주 이상룡 선생도 당시 이 대열의 리더로 활동했다. 그는 1911년 2월 유하현에 도착해 이시영, 이회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항일단체 경학사를 설립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도 세웠다. 모국의 농민들을 모집,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장정들을 뽑아 군사교육을 시키는 등 장기적인 독립운동에 대비한 것이다.

이같은 항일지사들과 함께 일제의 탄압과 경제수탈을 피해 이주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초기 문건은 1910년대의 이같은 조선인의 만주 이민에 대해 '한국 민중들은 일제의 그같은 착취에 못견디어 노소를 거느리고 유리걸식을 하며 만주로 이주하는 자가 날마다 늘어나 해마다 몇만명 내지 몇십만명에 달했고, 애국지사들의 망명도 해마다 수천명을 헤아린다. …조선의 난민들은 무자비한 착취와 학대를 받아 토지를 잃거나 혁명하다가 쫓겨나 천연적으로 반일과 조국 광복의 민족혁명사상을 지니게 되었다'라고 기술, 당시의 이민 규모와 성격을 짐작케 해준다. 다시말해 이 시기의 이민활동의 주류는 정치적 성격을 띤 망명이주였다는 설명이다.

일제가 토지와 양곡을 수탈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산미증산계획(1920~1934)이 이 땅의 농민들, 특히 소작 농민들을 토지에서 이탈시키는 재앙을 낳으면서 1920년대 이후 토지와 가옥을 빼앗긴 삼남지방, 그중에서도 경상도 농민들의 대량 이주를 불러왔다. 또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만주지역을 강점하면서 이 지역을 식량기지로 삼기 위해 개척이라는 미명하에 조선인의 대량 강제이주를 획책, 1945년 당시 재만조선인의 인구는 213만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로써 1920년대 이후에는 만주이주가 초기 자발적 이민들이 가졌던 지역적 경향, 즉 함경도와 평안도 등 국경 인접지역 위주에서 벗어나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남부지역 출신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 논농사에 익숙한 경상도 등지의 농민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지역에 이주하면서 이 지역에서도 쌀농사가 대량으로 시작된다.

길림성과 봉천(현재의 심양) 등지로 이주한 경상도 사람들은 먼저 정착해 논농사에 적합한 땅을 선점한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을 피해 계속 내륙으로 이주하면서 쌀농사를 전파했다. 경상도 사람들이 당시 중국으로 이주한 경로는 세가지 정도. 신의주를 거쳐 봉천으로 이어지는 철도와 길림성 통하시·유하·매하구시·장춘시·구태시를 거쳐 흑룡강성으로 이어지는 경로, 도문을 거쳐 길림시와 영길현·흑룡강성 오상시와 상지시 아성시 등지로 이어지는 노선 등이다. 서로 중복되기도 하는 이같은 경로를 거쳐 만주로 이주한 경상도 농민들은 흑룡강성 전역은 물론 내몽골 지역으로까지 확산, 현재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수이면서도 가장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양상을 보이게 된 것. 흔히 중국과의 국경을 따라 지도를 접으면 한국지도와 원적지별 조선족들의 분포지역과 겹친다는 이야기처럼 북한과의 변경지대는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들이, 국경에서 가장 먼 내륙지방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많다.

이같은 넓고 긴 이주경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경상도 출신들의 정착과정은 가장 험난했다. 이들은 뒤늦게 이주하는 바람에 끊임없이 내륙으로 이주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고, 논을 일궈놓고 나면 토지사용료를 올려 땅을 빼앗는 한족 지주의 횡포, 추운 기후에 따른 냉해와 수해· 가뭄 등의 자연재해는 물론 일제의 공출과 만주군벌의 횡포, 잦은 비적의 출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투 등으로 경상도 출신 조선족은 늦게는 50년대까지 유민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산당정권에 의한 토지분배가 끝나서야 비로소 이같은 고초가 끝난다.

황유복 북경중앙민족대학 교수는 "광복직후 상당수의 이주민들이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경상도 사람들은 워낙 내륙으로 깊이 진출한 데다 소식도 늦고 길이 막혀 상당수가 그대로 머무른 결과 현재 원적지가 경상도인 조선족은 5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며 "보다 정확한 경상도 이주민의 현황 파악을 위해서는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55] 제2부 中國속의 경상도를 찾아서
겨울 땔나무를 준비하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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