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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마을 .71]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태양촌(상)

2004-10-04

"조선인은 얼구이즈!" 漢族들 공포의 노략질
日 패망후 입은 옷까지 빼앗겨
볏단거적 두른 피난민들 몰려
행렬엔 겁탈우려 숯검댕이 칠

[마을 .71]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태양촌(상)
태양촌 1조마을에 있는 하동 조선족 소학교.

흑룡강성에서 터를 잡고 사는 조선족의 원적지는 경상도가 대부분이다. 그중에서도 오상시와 상지시 주변은 경상도 출신 조선족의 밀집도가 특히 높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흔히 경상도사람 모종 부어놓았다는 농담도 오고 간다. 함경도 사람들이 선점한 길림성과 평안도 출신의 수가 우세한 요녕성 지역을 벗어나 물과 땅, 그리고 고향이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아 내륙으로, 내륙으로 깊숙이 이주한 결과다.

하동향 태양촌은 하얼빈 동쪽의 상지시에서 30여분 거리 떨어져 있는 조선족 마을. 그 태양촌을 찾아가는 날 아침부터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4월 중순 길림시에서 눈을 맞고 왔는데 5월 초입의 하얼빈에서는 봄비가 처량하다. 고맙게도 흑룡강신문의 김태산 기자와 이화 기자가 안내를 맡아준다. 9일이나 계속되는 노동절 연휴기간인데도 불구하고, 폐를 끼치는 탓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태양촌은 모두 8조로 나뉜 조선족 마을이다. '조'라는 단위는 하나의 생산단위를 가리키는 집단경제체제 시절의 흔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8개 마을을 하나로 묶어 태양촌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마을을 지나는 비포장 도로를 따라 순서대로 1조, 2조, 3조 등의 순으로 나뉜다.

태양촌의 전체 가구수는 400호. 그 가운데 60호가 살고 있는 태양 1조는 조선족 소학교가 있는 중심 마을이다. 하동향 소재지와 가장 가까운 지리적인 위치 탓에 소학교가 여기 있다. 노동절 연휴로 휴교중인 데다 비까지 내리는 탓에 학교 운동장에는 인적이 없다. 태양 1조 마을은 학교 맞은편과 오른편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호구가 60호라지만 등록된 가구수가 그렇다는 뜻일 뿐 현재 살고 있는 주민수는 고작 80명에 불과하다. 역시 한국바람 탓이다.

"온 집이 다 한국으로 나간 집도 있고, 이래저래 평균 한 집에 둘은 한국에 나가 있을 겁니다." 순박하게 생긴 1조마을의 책임자 박용진씨(38)는 어눌한 어투로 한국바람을 설명한다.

어디가서나 듣는 이야기지만 이같은 한국바람 탓에 조선족이 겪는 부작용과 후유증은 심각하다. 돈을 못벌어와 빚 때문에 이혼하는 사례 등 10쌍에 서너쌍은 이혼했을 것이라니 선뜻 믿어지지않을 만큼 그 후유증은 심각하다. 만주벌판의 겨울바람 따윈 한국바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비를 피하자'며 박씨가 자신의 집으로 취재진을 안내한다. 길에서 골목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자리잡은 허름한 초가가 그의 집이다. 부엌과 붙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가자 방과 부엌사이 천장 바로 밑에 구멍을 내고 전구 하나로 두 곳을 모두 밝히는, 20~30년 전 우리네 시골에서 흔히 봤던 알뜰한 지혜가 눈에 띈다. 그 모습을 보며 기자가 "우리도 옛날엔 저랬는데…"라며 재미있어 하자 박씨의 부인은 "정지에도 따로 불이 있다"고 얼른 대꾸한다. 혹시나 옹색하게 비칠까봐 염려하는 기색이 엿보여 괜시리 미안해진다.

"한국 때문에 큰일났다"고 말하는 박씨는, 그러나 자신도 한국으로 가고 싶은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부인 또한 "한국에 너무 많이 나가 있어요. 한국에 나가 있는 사람들이 좀 많이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좀 쉽게 나갈 수 있게…"라며 한국바람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다. 쌀농사를 10㏊나 짓는다는 억척같은 농사꾼 부부에게도 한국바람은 어쩔 수 없으니 여간 큰일이 아니다.

박씨 부부는 이같은 희망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행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행을 주선해준다면서 돈만 받아 챙기고 종적을 감춰버리는 사기꾼에게 걸려 패가망신이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경상도 출신 가운데는 한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박씨는 그럴 입장도 아니다. 어쩌면 한국에 친척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원적지가 경남인지, 경북인지도 모르는 박씨가 친척을 찾을 희망은 현재로서는 없다.

화제를 바꾸기 위해 노인분들을 만나러 노인협회로 가보자고 하자 박씨가 난처해 한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향소재지에서 유력한 조선족의 환갑잔치가 있어 노인들이 모두 거기에 갔다는 것. 조선족 마을에서 결혼식이 드물어지면서 환갑이 아주 큰 잔치로 대접받고 있다. 아무튼 행여 남아 있는 노인이 있는 지 찾아보겠다며 박씨가 빗속의 마을을 헤맨다.

잠시 뒤 그는 노인 두분을 찾았다며 마을 중앙에 있는 성필옥 할머니(77)의 집으로 기자를 안내한다. 박씨의 집에 비하면 현대식의 대궐같은(?) 성씨의 집에는 부산 구포가 고향인 성씨와 함께 전남 담양이 고향인 정판녀 할머니(82)가 한국에서 왔다는 손을 기다리고 있다.

정씨는 연변대 부총장을 지낸 정판룡 선생(1931~2001)의 큰 누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정판룡 선생은 '고향 떠나 50년'이라는 책을 펴내 고향인 전남 담양에서 만주로 이주해서 겪은 가족사를 세상에 남겼고, 기자도 이번 취재여행중에 그 책을 읽었다. 덕분에 새삼 정 할머니의 이야기는 다시 청할 필요가 없다.

성 할머니는 13세 때인 1940년 만주로 이주했다. 만척이 흑룡강성 연수현의 산골을 개척하기 위해 부산의 구포와 김해 일대에서 모집한 가난한 농민 300호 가운데 머슴살이를 하던 그의 아버지가 끼여 있었던 것.

"일본놈들이 툰(屯)을 세개 만들어 사람들을 분배했어요. 아름드리 나무하고 잡초만 무성한 벌판이었는 데 잡초를 비내고 볏종자 뿌리니 뿌리도 못내리고 둥둥 떱디다. 5년 동안 황(흉년)나 입쌀은 기겅도 못했어요."

형편이 이랬지만 먹을 것도 돈도, 입성도 없는 농민들은 도망도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머슴살이 하던 구포가 차라리 나았다고 땅을 치며 후회했다. 콩, 수수, 강냉이, 조, 소금 등 만척의 배급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버티는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던 중 이번에는 장티푸스가 돌기 시작, 전 주민의 3분의1이 죽어나갔다. 1945년의 일이었다. 그 와중에 광복이 되자 책임자들은 중국인 옷을 구해 입고 도망가버렸다. 조선인을 얼구이즈(두번째 일본놈)라고 부르며 적개심을 드러내는 한족의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예상했던대로 헐벗고 힘없는 불쌍한 조선농민만 사는 마을에도 조선인을 일인과 동일시하는 한족 토비들의 노략질이 자행됐다. 그들은 야밤에 마을로 들어와 부녀자들이 입고 있던 옷가지까지 빼앗아갔다. 옷이래야 5년 전 이들이 조선에서 들어올 때 입고 온 낡디낡은 것이었지만 그들의 폭력과 탐욕은 끝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하고, 300명 정도만 남게 되자 농민들은 의논 끝에 살 길을 찾아 함께 떠나기로 뜻을 모았다.

마대자루를 입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볏단거적을 두르고, 여자들은 겁탈이 두려워 얼굴에 숯검댕이를 칠한 낮도깨비같은 형상을 한 이들은 이가점과 조양을 거쳐 그해 9월1일 하동에 도착했다. 하동에는 당시 1천여호의 조선인이 만척이 개척한 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주변 산골의 조선농민들이 하동으로 몰려든 것은 같은 핏줄이 보다 많이 있는 곳을 찾아가면 서로 의지도 되고, 살 길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성씨 일가족 등 연수현에서 몰려온 농민들이 합세했을 때 하동의 조선농민 역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가을걷이를 해야 할 시기였지만 벌판엔 누렇게 익은 벼가 그대로 서 있었다.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판에 추수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마을 .71]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태양촌(상)
태양촌 전경.
[마을 .71]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태양촌(상)
춤을 추며 취재진을 반기고 있는 성필옥 할머니(오른쪽)와 정판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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