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아픔…아픔…
가슴에 고이접어 묻어두고 떠났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노래는 푸른돌로 굳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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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일러스트 김정태화백 |
1. 비파강의 백설공주
비파강이 조잘거리며 흐른다. 강가에 또 아이들이 모인다. 영도는 오빠 호우가 묻어놓은 사발묻이를 지키느라 투명한 강물을 보고 또 보곤 한다. 사발묻이에는 보릿가루를 뭉쳐서 만든 미끼가 들어 있어서 붕어랑 피라미들이 그 냄새를 맡고는 모여들어 기웃댄다.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은 채 물에 들어가 찰방대고, 초여름이지만 더우면 성급하게 헤엄을 치기도 한다. 그렇게 노느라니 하루해가 깜빡 산등성이를 넘어가려 한다.
"얘. 저녁이다. 할머니에게 가야지."
오빠가 말한다. 할머니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시간이 된 것이다.
그 다음 날에는 집 안 감나무 아래서 감꽃을 줍는다. 또 이웃집 아이들과 소꿉놀이가 벌어진다. 영도는 늘 주인공이다. 백설공주 역을 맡는다. 실에 감꽃을 꿰어서 만든 목걸이를 하고 꽃관을 쓴 공주는 계모에게 내쫓겨 울며 집을 나간다.
밤이 깊은 데도 잠들을 잊은 듯이
집집이 부엌마다 기척이 멎지 않네
아마도 새날 맞이에 이 밤 새우나보다
아득히 그리워라 내 고향 그 모습이
새로 바른 등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제상에 제물을 두고 밤새기를 기다리나
벌써 돌아보랴 지나간 그 시절이
떡가래 썰으시며 어지신 할머님이
눈썹 샌 전설을 풀어 이 밤 새우시더니
-'제야' 부분
2. 결혼, 그리고 시인이 되다
훗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시다. 다복했던 날들이 드러난다. '이선달네 집'으로 통했던 부잣집의 예쁜 딸이었다.
1916년생이니, 오빠 호우보다 네 살 아래다. 고집이 셌다. 밀양보통학교에 입학하지만, 할아버지가 세운 의명학당에도 다녔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학교를 그만두지만, 나중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중퇴했다는 이력이 보인다.
"이선달네 집 손녀가 대구 부잣집으로 시집 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뒷산에 참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 이영도는 시집을 갔다. 신랑은 대구시 인교동의 명문 박기주. 1년후 딸을 낳았다. 동지(뒤에 진아로 개명)라고 불렀다. 딸을 키우며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편이 결혼 8년만에 위궤양으로 사망했다. 광복되던 해였다.
영도는 갑자기 자기 앞에 닥친 불행을 감당하기 어려웠을까?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일까? 남편이 죽기 전까진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만 오빠 호우의 영향으로 문학책을 빌려 읽으면서 어렴풋이 그 재질을 드러냈을 듯하다. 남편이 죽은 그해 통영여중 교사로 부임한 그녀는 처음으로 앞에 소개했던 시조 '제야'를 쓴다. 그 시를 그 이듬해 '죽순' 창간호에 발표, 시조시인으로 문단에 깜짝 얼굴을 내민다.
통영여고에는 윤이상과 청마 유치환이 교사로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시골 아저씨같이 생긴 유치환의 시선은 남달랐다. 그 시선이 훗날 두 사람을 사랑으로 엮을 줄을 그 때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3. 哀歌와 정한의 노래
이영도는 삶이 시의 원천이란 생각을 늘 했다. 시는 현실의 언어적 대응이라고 여겼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진달래- 다시 보는 4·19에' 전문
4월 혁명에서 희생된 꽃다운 젊음을 진달래의 꽃사태로 비유한 것이 절묘하다. 그들은 갔지만 봄이면 멧등마다 피어나 물이 드는 진달래처럼 그들은 언제까지나 피어나는 아름다움으로 가슴에 자리한다고 믿는다. 그들 앞에서 살아있는 자신은 차라리 욕된 것이라 여기는 부끄러움의 마음. 이 시는 노래로 작곡되어 운동권 학생들의 애창곡이 되기도 했다.
눈에 포탄을 박고 머리는 맷자국에 찢겨
남루히 버림받은 조국의 어린 넋이
그 모습 슬픈 호소인양 겨레 앞에 보였도다
행악이 사직을 흔들어도 말없이 견뎌온 백성
가슴 가슴 터지는 분노 천동하는 우레인데
돌아갈 하늘도 없는가 피도 푸른 목숨이여!
-'애가- 고 김주열 군에게' 부분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군을 그리는 노래다. 이영도는 때때로 수유리 산기슭을 찾아가 4월의 탑 앞에서 삶을 생각하곤 했다.('天啓-사월탑 앞에서'의 시작메모) 4월의 탑이야말로 이 땅 젊은이들의 표상이라 기렸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조선 여인의 정한의 정서를 단아하게 드러냈다. 그녀의 시는 이 방면에서 아주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음은 그 대표적인 시다.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한 듯 둘렸다
-'단란' 전문
4. 사랑하였으므로 외로웠느니라
청마 유치환과의 사랑은 운명같은 것이었다. 남편을 잃고 얼마 안 되어 교사 발령을 받은 곳이 하필이면 유치환이 근무하고 있었던 통영여고였던 것도 그러했다. 유치환은 매일 편지를 보냈고, 그녀는 그걸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3년 지나서야 비로소 이영도의 마음이 움직였다.
나중에 부산여고에 있을 때였다. 청마는 경남 안의에 있었다. 새벽 6시에 안의를 떠나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부산에 왔다. 둘은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나 얘기를 나눈 다음 헤어졌다. 청마는 부산에 있는 둘째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새벽에 다시 12시간을 버스를 타고 안의로 돌아갔다. 늘 그런 식이었다.
편지를 주고받고 이렇게 만나는 지극함이 계속됐다. 그러나 그 만남은 청마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1967년 2월13일. 둘은 또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후 2시쯤 청마는 그 약속을 취소한다고 전화했다. 예총 모임 때문에 못 만난다며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반복했다. 다시 11시간 뒤쯤 전화가 왔다. 청마가 아니었다. 대학병원이라 했다. 청마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면서 미어졌다. 그날 밤 그녀는 미국에 가 있는 딸 진아에게 편지를 썼다. '그이가 죽었다. 그이가 죽었다'고.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탑.3' 전문
청마가 죽은 후 발표한 시다.
그녀가 염원한 그 사리는 어쩌면 20여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청마 사후에 묶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아닐까?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인세 때문에 청마의 유족과 말썽이 생기자, 그녀는 그 돈을 현대시학사의 시작품상 기금으로 쾌척한다. 이후 그 돈은 정운시조문학상 기금의 밑거름이 된다. 그리고 이후 오랫동안 주위의 호기심어린 시선과 외로움이 그녀를 괴롭힌다.
1976년 3월6일 이영도는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녀의 삶은 아픈 삶의 연속이었다. 통영여중 교사 시절에 폐침윤이 발병해 마산결핵요양원에서 휴양을 했다. 부산 남성여고 교사로 있던 1954년에 폐침윤이 재발해 다시 마산에서 요양할 겸 성지여고로 옮겼다. 죽기 10년 전에도 뇌출혈이 있었다. 당시 딸 진아는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진아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듣고도 갈 수가 없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어머니에게 송금하며 회생(回生)을 빌었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이영도는 병을 떨치고 일어났다.
이영도는 딸이 보낸 돈으로 자신의 수의를 장만해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죽음이 비애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가는 영광이라 믿으며, 마치 웨딩드레스처럼 명주로 수의를 만들어 치맛단에 꽃을 만들어 붙였다. 머리에는 흰 너울을 준비했다. 그리고 진아가 고국에 돌아와 결혼을 하고 첫 아들을 낳던 해(1971년)에 유서를 써서 수의 갈피에 꽂아두었다. 병이 잦음에 따라 언제 갈 지 모른다며 그런 준비를 해둔 것이다. 이영도의 타계 후 딸 진아는 그런 사연을 들먹이며 울먹였다.
이영도는 손수 장만한 꽃 드레스를 입고 천국으로 갔다. 유서에는 "내 주검은 화장해서 그 가루를 산수 좋고 공기 맑은, 아름다운 계곡에 뿌려다오.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문인장(葬)이 치러질 때 참석한 문인들이 고인의 유언대로 하자고 했으나, 딸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노라면 슬픔과 그리움이 사무칠 때가 있다. 그 때 찾아갈 곳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해를 화장해서 그 뼈를 고향 선영에 묻었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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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 시인의 한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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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자필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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