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대구서 활약…20여년간 옥고 치르기도
부인·장남은 달성군 거주…대구시 흉상 건립 추진
“20여년간 옥고를 치르며 국권회복을 위하여 불꽃처럼 살다간 향토출신 백산 우재룡 선생을 기억 하시나요?”
지난해 1월의 독립운동가로 향토출신 백산 우재룡 선생이 선정되어, 선생의 나라 사랑이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일제의 강압통치에 분연히 투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무수히 많지만 선생은 단연 우뚝 선 인물이며, 향토 대구를 활동무대로 일제와 맞선 구국의 정점에 선 인물이라 하겠다.
선생은 1884년 1월3일 경남 창녕에서 출생했다. 유년시절은 창녕에서 보냈으나 10세 전후 대구(옛 달성군 성서면 신당리)로 이주해 성장기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다. 1903년 20세때 대한제국 육군의 대구진위대에 입대하여 참위로 5년간 복무하였고 1907년 을사늑약때 군대가 해산되어 그때부터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창녕 화왕산전투, 청하전투, 팔공산전투 등을 직접 지휘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는데 일제에 체포되어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아 2년여를 복역하던 중 1910년 한일병합 기념특사로 풀려났다. 선생의 나라 사랑은 변함이 없어 이후 활동무대를 만주로 이동하여 이상룡, 김동상, 김좌진 등 애국지사와 함께 무장투쟁을 계속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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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백산 우재룡 선생의 부인 김소전 여사는 현재 달성군에서 살고 있다. |
3·1 만세운동 즈음 국내로 잠입하면서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며 독립투쟁을 계속하였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37세에 체포되어 17년간 다시 옥고를 치렀다. 54세에 출감했을 때 부인과 1남2녀는 혹독한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로 병사해 가족 모두가 없어지는 고통을 당했다. 그 후 옥고로 얻은 병을 치료하던 중 현재의 경주 김씨를 배필로 맞아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선생은 이후에도 서울을 왕래하면서 대한광복회 재건에 전력투구 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 선생은 광복의 소회를 “하늘의 이치는 올바른 것이다. 죄악이 많은 일제가 항복하니 나도 이 세상에 살아서 분을 풀 날이 있구나”하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광복후에는 향리와 가까운 달성군 유가면 유곡리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희생자들의 선양사업을 전개하는 등 애국 활동을 계속하다가 1955년 71세 일기로 운명했다. 선생의 유해는 달성군 유가면 옥녀봉에 안장됐다가 1967년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부인 김소전 여사(98)는 장남 대현씨(68)와 함께 달성군 화원에서 현재 거주중이다.
차남 상현씨(60)는 “세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선친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 사랑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특히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셨다고 한다”고 말했다.
대구시는 선생의 뜻을 기려 대구 두류공원내 인물조각 동산에 흉상을 건립하고 학술대회를 통해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글·사진=이외식 시민기자 2whysi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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