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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龜尾史 .10] 왕건, 대업을 꿈꾸다 (下)

2012-08-29

아들에 쫓겨난 견훤과 손잡고, 삼국통일 ‘최후의 전장’ 선산으로…

20120829
태조 왕건이 후백제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했던 구미시 고아읍 관심리 앞 어갱이들. 지금은 곡창지대로 변해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없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Story Memo

일리천전투(936년)는 고려를 세운 왕건이 후백제와 최후의 한판승부를 벌인 전투로 유명하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일리천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구미 선산일대다.

당시 후백제는 왕위쟁탈로 내분을 겪으면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고, 아들 신검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견훤은 왕건에게 후백제의 신검을 칠 것을 청한다.

왕건은 이를 받아들여 일선군으로 진격해 후백제의 신검을 물리친다. 당시 고려군은 무려 8만7500여명으로 후삼국시대 전투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건 중요한 전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투가 벌어졌던 일리천은 낙동강 지류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논픽션 구미史’ 10편은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 계기가 된 구미 선산의 ‘일리천전투’에 대한 이야기다.


#1
서기 936년 9월, 초가을 기운이 완연한 가운데 한낮의 햇살이 뜨겁다. 왕건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서, 앞서 6월에 태자 무와 장군 박술희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대기하며 전국에서 집결하는 군인을 조련하고 있던 군과 합세, 곧장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구미 선산지역)으로 이동한다. 현 문경지역으로 해서 상주를 거쳐 선산지역으로 들어와(일설에는 문경-안동-예천-의성으로 진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고려 왕건 군대와 후백제의 신검 군대는 팽팽하게 대치한다.

고려의 각 부대는 깃발을 선두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드디어 사열이 시작된다. 왕건과 함께 부대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견훤이다. 군인들은 왕건과 견훤이 나란히 말을 타고 부대를 점고하는 광경을 기이하게 여긴다. 어제까지만 해도 둘은 앙숙지간이 되어 싸움을 계속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견훤이 ‘우리 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고려군은 사기가 충천하는 느낌이다. 왕건도 그런 기운을 느낀다.

생각하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 벌어져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는 생각이 든다. 왕건 최대의 승전으로 꼽히는 고창(古昌: 안동)전투에서 왕건과 견훤은 격렬하게 맞붙어 한때 피나는 고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견훤은 대패했고, 도주했다. 도주하는 적의 후방을 휩쓸면서 왕건은 비로소 공산(팔공산) 동수전투에서 입은 패배의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선산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는데, 고창전투의 대승은 뜻밖에도 많은 이득을 가져와 고창 일대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했다. 다른 군현과 성도 고려에 투항하는 수가 늘어났다. 그런 가운데 대업 해결의 실마리는 뜻밖에도 견훤이 태도를 달리한 데서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견훤의 집안싸움에 있었다. 견훤은 막내아들 금강을 특별히 사랑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를 눈치챈 장남 신검이 선수를 쳤다.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로 유폐시키고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 견훤은 땅을 쳤다. 사위 박영규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한 견훤은 곧바로 개경에 연락해 투항 소식을 전했다. 왕건을 만난 견훤은 비통한 어조를 감추지 않았다.

“내가 아들을 잘못 두었소. 부디 신검을 토벌하여 주길 바라오.”

왕건은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견훤은 거듭 요청했다. 마침내 왕건의 마음이 움직였다.

“좋소. 함께 전투에 임해서 신검을 잡읍시다.”

그렇게 해서 왕건과 견훤이 나란히 고려군 진영의 복판에 서게 된 것이다.

왕건은 9만명(삼국사기에는 10만7천 또는 8만6천여명)의 대군을 사열하면서 진영을 짠다. 기마군 1만 명과 보병 1만명으로 좌강(左綱:좌군)을 삼고, 역시 기마군과 보병 2만으로 우강을 삼는다. 중군으로는 기마군 2만과 기병 9천5백여명을 배치한다. 이 밖에 보병 수천명과 여러 성의 원병군 1만여명이 참가한다. 이 전투에 참가한 군대는 고려군과 지방 호족의 군대는 물론, 926년 거란에게 정복당한 후 고려 땅으로 대거 옮겨 온 발해 유민도 포함되어 있다. 중군에 배치한 후삼국 최강의 장수 유금필이 이끄는 말갈기병도 눈에 띈다.

두 부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수많은 깃발이 펄럭이고 창검이 따가운 햇살에 반짝인다. 왕건은 강 건너 자욱한 먼지 속에 번쩍이는 후백제군의 창검을 보면서 이제 대업을 이룰 때가 머지않았음을 예감한다. 견훤이 고려에 귀순한 것에 자극받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 얼마 전이다. 경순왕은 친히 개경으로 와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천년을 누려온 신라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후백제만 평정하면 천하의 대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신검의 부대는 강 건너 유난히 깃발이 많이 펄럭이고 있는 부대의 중앙을 유심히 살핀다. 왕건으로 보이는 갑옷 입은 이의 옆에 선 이가 견훤인 것을 알아본 군인들이 크게 술렁인다.

“우리의 왕이 저기에 있다. 어떻게 된 셈인가?”

군인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지는 온갖 유언비어를 신검은 안간힘을 다해 막는다.

“우리를 배반한 늙은이일 뿐이다. 동요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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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건너 보이는 높은 산이 고려 왕건이 숭신산성을 쌓고 후백제 견훤과 전투를 벌인 냉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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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이 냉산 중턱에 7개의 창고를 짓고 군량미를 비축하였다는 칠창. 구미시 해평면 낙산3리에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2
“10만의 대군인데다 우리의 왕이 직접 그 대군의 일부를 지휘한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후백제 진영에 퍼진다. 마침내 고려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꽹과리와 북소리가 울리면서 자욱하니 먼지가 인다. 먼지 속으로 반짝이는 빛들은 창검의 살기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후백제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면서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갑자기 고려군의 진영으로 백기를 든 군대가 먼지 속에서 나타난다. 고려군이 공격태세로 그들을 막는다. 백기를 든 군대 사람들이 말에서 내리고는 꿇어 않는다.

“우리 백제의 왕을 뵈러 왔소!” 누가 소리친다.

견훤이 나서자 그들은 일제히 견훤의 말 앞에 엎드린다.

“그대들은 누군가?” 견훤이 묻는다.

“백제의 좌장군 효봉과 덕술, 애술, 명길입니다. 저희는 고려군에 복속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래, 백제의 왕 신검은 패륜아니라. 그리니 정통성이 없느니라.”

“맞사옵니다. 우리 장병들도 그 점에서 신검 왕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항복은 대번에 고려군 진영을 흔든다. 고려군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갑작스러운 전세의 변화에 후백제군은 당황한다. 병사들의 사기는 갑자기 저하된다.

왕건이 나선다.

“신검은 어디에 있는가?”

“중군 속에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적의 중군을 좌우에서 협공하여 격파하고 신검을 잡아라!”

고려의 기마군과 보병들이 후백제군의 중군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한다. 전세는 고려에게 유리해진다. 후백제군은 우왕좌왕한다. 고려군은 파죽지세로 후백제군을 유린, 후백제의 장수인 흔강(昕康)과 견달(見達) 등을 비롯하여 군사 3천200여명을 사로잡고 5천700여명의 목을 벤다.

후백제군은 지휘체계가 흔들리면서 교란이 일기 시작한다. 고려로 투항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기네끼리 “항복하자” “안 된다.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다투는 지경으로까지 이르더니 결국 서로 창을 겨누면서 싸움을 벌이는 아비규환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신검은 할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린다. 군사들은 먼지 속에서 퇴로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면서 숱한 사상자를 낸다. 달아나는 후백제군을 고려군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는다. 후백제군은 밤낮없이 달아나 황산군(黃山郡: 충남 논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炭嶺: 대전 동쪽 식장산)을 넘어 마성(馬城: 옥천)에 주둔한다. 그러나 추격의 끈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는다. 신검은 비통한 심정으로 추격군의 동태를 묻는다.

“그들이 어디까지 따라붙었느냐?”

“황산에 이미 도달했다 합니다.”

“그렇다면 완산주로 오는 길목이 아니냐?”

신검은 절망적으로 외친다. 후백제의 본거지인 완산주가 점령되면 더는 어디로 갈 데도 없다. 신검은 칼을 꺾는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황산으로 가자.”

신검은 아우 청주(강주)도독 양검, 무주도독 용검 및 문무신료를 데리고 왕건 앞에 엎드린다. 비로소 왕건이 후삼국의 통일을 이루는 순간이다.

왕건은 반란을 주모한 능환을 참수한다. 포로가 된 병졸은 모두 풀어준다. 항복해 온 문무신료들은 능환을 제외하고는 위로하고 송악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한다.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귀양 보냈다가 조금 뒤에 죽인다. 신검은 항복했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한다(삼형제를 모두 죽였다는 설도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견훤은 우울함에 휩싸인다. 자신이 이룬 대업이 자신의 대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버린 게 너무 마음 아프다. 마음의 상처가 큰 데다 몸도 등창이 매우 심하게 나는 등 만신창이가 된다. 그리하여 황산(논산)의 한 절에서 사망한다.


#3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선산지역 일리천전투의 현장인 일리천이 어느 강을 지칭하는지에 대해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하다. 현 낙동강을 지칭한다는 설도 있고, 낙동강의 지류인 감천이었을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견훤의 아들 신검의 부대가 집결한 곳은 지금의 고아읍 일대다. 고아읍 관심리 앞 들판을 ‘어갱이들’이라 한다. 송림리 앞들은 ‘발갱이들’이라 하며, 괴평리 앞들을 ‘점갱이들’이라 한다. 매봉산을 중심으로 삼각형을 이루는 들판이다.

태조 왕건이 매봉산을 사이에 두고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를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 주둔시켰다고 해서 이곳을 ‘어검(御劒)평’ 또는 ‘어갱이들’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진을 쳤던 곳을 ‘장대(새도방)’라 한다. 신검이 송림리 앞들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군사를 괴평리로 옮겨 배수진을 친 곳이 ‘발검(撥劒)평야’, 곧 ‘발갱이들’이 된다. 태조 왕건이 매봉산 서쪽 낮은 구릉으로 진격해 기습 작전을 펴서 점령한 곳이라 해서 ‘점검평야,’ 곧 ‘점갱이들’이라 한다. 이들 지명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주민에 의해 불리고 있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도움말=구미문화원, 김홍균 전 구미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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