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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 전북 진안성당 어은공소

2013-05-31

박해의 시절에도 평화로웠을 것 같은…그때 그 모습 그대로…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 전북 진안성당 어은공소
진안성당 어은공소 전경. 우리나라 초기의 한옥 성당 건축 양식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천주교 박해로 형성된 교우촌에 세워진 공소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2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골짜기가 넓어 빛이 많다. 마을은 작지만 산뜻하다. 그래서 아주 깊고 외진 골짜기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나아갈 곳 없는 깊고 깊은 골, 길의 끝이다.

전북 진안의 동쪽, 장수와 경계를 이루는 성수산의 북쪽 골짜기에 길이 끝나는 마을 어은동이 있다. 부칠 땅이 적고 물산이 부족해 옛날 임금님들도 진안의 공물은 그다지 챙기지 않았다던가. 난리가 나면 오히려 인구가 늘었다는 오지, 숨어 살기 좋은 땅. 어은동도 그런 땅이었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도 물고기가 숨은 형상이라는 어은(魚隱)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 전북 진안성당 어은공소
어은공소의 외형은 한옥, 내부 구조는 서양의 바실리카 형식이 접목된 것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 전북 진안성당 어은공소
어은공소의 내부. 옛날에는 중앙 기둥 사이를 칸막이로 막아 좌우 남녀 석을 엄격히 구분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았던 곳… 전북 진안성당 어은공소
어은공소의 종탑.



◆박해받던 이들이 숨어 살던 땅, 어은동

물고기는, 암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그리스어 앞 글자를 모으면 ‘익투스’가 되는데, 이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초대교회 시대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하의 공동묘지에 숨어 살았다. 미로와 같은 컴컴한 지하도시에서 물고기는 서로의 의사소통과 신분 확인을 위한 암호였고 비밀 집회 장소를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또한 물고기는 그 자체로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 고백이었다.

어은, ‘물고기를 숨기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어은동은 조선시대 유교의 질서와 정치적 파란 속에서 박해받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들어 와 살았던 땅이다.



진안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였다.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같은 곳에서 도망쳐 온 그들은 전북의 고산 지방에 흩어져 살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집, 즉 공소를 짓고 교우촌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박해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은 전통 마을과 달리 공소를 중심으로 신분계층이나 서열과 관계없이 형성된 괴촌으로, 공소는 선교 초기부터 오랫동안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예배 장소이자 신앙 공동체의 거점이었다. 또한 공소는 일제강점기 말까지 존재해 왔던 국내 그리스도교 건축의 주류 형식을 보여 준다. 바로 한옥교회다. 어은동이라는 교우촌의 중심에도 한옥 교회가 있다.



◆진안 성당 어은공소

어은동 골짜기에 천이 흐른다. 물은 적지만 제법 너르다. 노인 회관 앞에서 다리를 건넌다. 너른 마당이 펼쳐져 있고, 살짝 높인 단 위에 담백하고 단정한 한옥 한 채가 서 있다. 건물 앞 바위 위에는 성모상이, 옆에는 종탑이 서 있다. 두 그루 벚나무가 무성한 잎을 흔들며 청량한 바람을 일으킨다. 진안성당 어은공소다. 지금은 진안 성당에 속해 있는 공소지만 1909년 건물이 세워졌을 당시에는 진안에서 처음 설립된 본당이었다.



목조 한옥 건물에 너와 지붕이 얹혀 있다. 한국교회 건축물 중 유일한 천연 돌판 지붕이다. 지붕의 점판암은 성당을 지을 당시 30리 떨어진 백운면 미재에서 채취해 지게로 날라 왔다고 한다.

외관은 전통 가옥 형태를 띠지만 건물 진입 구조나 실내 평면의 공간 나눔은 서양의 바실리카 형식이 뚜렷이 드러난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에 따라 남녀의 출입문이 구분되어 있었고, 내부 또한 가운데 기둥 사이를 칸막이로 막아 좌우 남녀 석을 엄격히 갈라놓았다고 한다. 한옥 교회 안에 유교의 가르침과 서양의 형식이 공존하는 셈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칸막이가 어떻게 세워졌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외벽에 걸린 오래된 교우들의 단체사진에서도 남녀유별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의 마룻바닥은 초기에 지어진 그대로라 하고, 의자는 전주성당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라 한다.



어은동 공소의 최초 설립은 1888년이다. 그때는 현재의 전동 성당인 전주 본당에 속해 있었다. 1900년까지 전주본당 소속의 공소는 27개나 설립되었는데, 어은 공소는 1897년에서 1898년 사이 본당 관할의 지역 가운데 신자 수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에 어은 공소는 1900년 본당에서 분가해 전주의 동쪽 지방인 진안과 장수, 남원 일대까지 관장하는 본당이 되었다. 이후에도 신자 수는 꾸준히 늘어 여러 차례 수리 확장했고, 결국 1909년에 현재의 성당을 완공한다.

당시 주임 신부였던 김양홍 신부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채에 영신학교를 세우고 국어, 한문, 산수 등을 가르쳤다. 학생이 늘면서 성당 앞마당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지금 널찍한 공터로 남아 주차하기 좋은 마당에 아마 학교가 서 있었을 것이다.



어은공소는 본당에서 공소로 여러 차례 지위가 변했고, 한국전쟁 때는 폐쇄되기도 했다. 나무 기둥이 돌 너와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현재 신자들은 진안의 본당으로 가며 어은공소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 지어졌던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반들반들하고 정연한 질서는 여전히 아낌을 받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가구 수 47호에 100여명이 사는 어은동은 지금도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다.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첫 모습인 공소, 어은의 골짜기에 어은공소는 자신의 첫 모습으로 서 있다. 박해의 시절에도 평화로웠을 것 같은 전경으로….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찾아가는 길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방향으로 가다 함양 분기점에서 장수 방향으로 간다. 장수 IC에서 내린 후 진안 방향 26번 국도를 타고 20여분 달리면 오천삼거리다. 오천초등학교를 끼고 좌회전해 약 4㎞ 가면 어은동이다. 어은동 노인정 앞에서 다리를 건너면 어은공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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