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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1] 경주 ‘용산서원’

2013-08-21

늙은 장수는 최후의 순간까지 ‘멸사봉공’을 가슴에 새기다
조선시대 대표적 청백리 잠와 최진립 기려
보기드문 큰 글씨 편액…명필 이서의 작품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1] 경주 ‘용산서원’
병자호란 때 순직한 잠와 최진립을 기리는 용산서원(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강당 건물. 이 건물 처마에 걸린 ‘용산서원’ 편액 글씨는 당대 최고 명필 옥동 이서가 썼다.

옥동(玉洞) 이서(1662~1723)가 유명한 명필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의 글씨 편액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잠와(潛窩) 최진립(1568~1636)을 기리는 서원인 경주 용산서원에서 그의 글씨 편액을 만날 수 있었다. 서원의 강당 건물에 걸린 ‘용산서원(龍山書院)’ 편액이다. 기운이 넘치면서도 시원스러운 필체인 데다, 보기 드물게 큰 글씨의 편액이어서 서원을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끌게 된다. 이 서원에 그의 글씨 편액이 하나 더 있다. 강당 건물 뒤에 있는, 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렬사우(崇烈祠宇)’ 편액 글씨도 그의 것이다.

명필의 보기 드문 수작 편액 글씨 작품들이다.


◆ 동국진체 개척자 옥동 이서의 ‘용산서원’ ‘숭렬사우’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21] 경주 ‘용산서원’
동국진체의 개척자인 옥동 이서가 글씨를 쓴 용산서원 내 편액 ‘용산서원’(위)과 ‘숭렬사우’.

경주 용산서원(내남면 이조리)의 현재 건물들은 매우 단출하다. 대문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강당인 민고당(敏古堂)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뒤에 사당인 숭렬사우가 있다. 1699년에 건립된 용산서원은 고종 때인 1870년 철폐되었다. 현재의 건물들은 1924년에 중건된 것이다. 이전에는 청풍루(淸風樓), 서원청(書員廳) 등 여러 건물이 있었다.

5년 전 처음 용산서원을 들어섰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이 강당 처마에 걸린 ‘용산서원’ 편액이었다. 강당 건물의 가운데 한 칸 공간 전체를 가득 채워 걸려 있는 편액에 새겨진, 부드러우면서도 활달하고 기운찬 글씨가 눈길을 시원하게 했다. 처음엔 누구 글씨인지 몰랐는데, 옥동 이서의 글씨라는 것을 알고 ‘역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옥동은 조선 고유의 서풍이라 할 ‘동국진체(東國眞體)’를 개척한 명필이다.

이 편액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이고, 특이하게 틀 부분을 녹색으로 칠했다.

강당 뒤에 있는 사당의 편액 ‘숭렬사우’도 옥동 글씨다. ‘용산서원’ 글씨와 같은 필치다. 이 편액은 ‘용산서원’ 편액과 반대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되어 있다. 이는 임금이 내리는 사액 편액이기 때문이다. 판자 하나에 한 글자씩 새겨져 있고, 왼쪽 끝에 작은 글씨로 ‘숭정후67년9월 일 사액(崇禎後六十七年九月 日 賜額)’이라는 글귀가 있다.

용산서원에 대한 기존 자료를 보면, 용산서원은 1695년에 잠와를 제향할 사당을 처음 세우려고 하다가 흉년으로 중단하고 1699년에 사당을 건립했다. 이듬해 사당에 잠와 위판이 봉안됐다. 1701년에는 강당인 민고당과 호덕재(好德齋), 유예재(遊藝齋) 등이 완공됐다. 그리고 1711년(숙종 37)에 나라에서 ‘숭렬사우’라는 사당 편액을 내렸다. 편액 글씨는 옥동 이서가 썼고, 기문은 그의 이복 동생인 성호 이익이 지었다. ‘용산서원’이라는 이름도 당시에 정해지고, 그 편액도 옥동이 썼다.

그런데 ‘숭렬사우’ 편액에 부기된 내용인 ‘숭정후67년’은 1694년인데, 당시는 서원이 건립되기 전이다. ‘숭정후67년’과 관련해 잠와 후손 최채량씨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사액 결정은 1694년에 있었고 옥동의 편액 글씨도 그때 썼으나 당시는 사당이 건립되기 전이고, 사당이 건립된 후인 1711년에 사액 편액을 만들어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옥동이 이곳에 편액 글씨를 남긴 연유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당시 후손들이 잠와를 현창하기 위해 다각도로 공을 들였는데, 초당적으로 여러 정파의 인물로부터 신도비명이나 신도비 발문 등을 받았다. 편액 글씨는 이 같은 차원에서 근기 남인이며 성호 이익의 형인 당대 명필 옥동으로부터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 용산서원이 기리는 잠와 최진립의 삶

용산서원에 배향된 잠와 최진립은 무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병자호란 때 일흔의 나이로 전장에 달려가 분투하다 순직한 장수이자 청백리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당하게 되었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왕의 밀지를 받고 근왕(勤王)을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향하면서 다른 장수에게 대신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공주 영장(營將)이던 최진립에게는 연로하기 때문에 뒤에 천천히 따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용인 험천에 이르러 보니 그가 벌써 진중에 와 있었다.

관찰사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잠와는 “내 나이 늙어 결코 영장에는 합당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함이 옳소. 하지만 임금께서 포위를 당하고 주장(主將)이 전장으로 달려가는데, 내 비록 영장 자리를 떠났다 한들 어찌 물러가리오”라고 답했다. 그리고 이어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老者雖不能戰獨不能死耶)”라고 말한 뒤 분연히 나아가 싸웠다.

결국 패색이 짙자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는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싸우다 죽을 것이지만, 너희들은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후 마지막까지 활을 쏘며 싸웠다. 나중에 그의 시체를 찾으니 화살이 수없이 박혀 고슴도치 털과 같았다.

이런 최후의 모습을 보였던 그는 평생 동안 무신으로서, 공직자로서 청렴과 멸사봉공의 자세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이런 그의 삶을 조사·관찰한 관리는 그에 대해 ‘진짜 맑은 이(眞淸者), 억지로 맑은 이(强淸者), 가짜 맑은 이(詐淸者)가 있다. 세상에 청렴으로 이름난 자들 모두 거짓 아니면 억지인데, 잠와만이 진짜 청백리’라고 평가했다.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도 감동적이다. 잠와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르며 진심으로 도운 노비가 있었다.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이다. 병자호란 때 잠와가 전장에서 마지막 순간, 따르는 자에게 후퇴를 명하고 옥동과 기별에게, “나는 마땅히 전장에서 죽으리니 너희 중에 나를 따를 사람은 이 옷을 받아 입어라”며 옷을 벗어던졌다. 기별이 울면서 그 옷을 주워 입고 “주인이 충신이 되는데 어찌 종이 충노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후 함께 싸우다 순사했다. 후에 잠와의 시체를 찾았을 때 그들의 시체도 곁에 있었다.

후손들은 두 종의 충심을 기려 잠와 불천위(不遷位: 영원히 제사를 지내며 기리는 신위) 제사 때 이들의 신주도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내며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1651년 잠와에게 ‘정무(貞武)’라는 시호가 내리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잠와를 기리는 용산서원은 무신을 기리는 서원으로는 드문 경우다. 또한 제사와 강학(講學)이라는 통상적인 서원 기능 외에 주민에 대한 대출 등 금융 기능과 빈민 구제 역할을 한 것이 특징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첫 체계적 서예이론·비평서 ‘필결’ 남겨

옥동 이서는

옥동 이서는 정파적으로 남인에 속하는, 잘나가던 명문가 출신이나 그가 태어날 때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가는 시기였다. 21세 때 부친 이하진이 유배지에서 별세한 후 관계 진출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30세가 넘어 학문과 덕망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박세채(1631~1695) 등의 천거로 찰방(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그는 부친(이하진)과 종조부(이지정) 등이 명필로 불리던 가문의 전통 속에 서예 공부에도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왕희지의 서예 법첩(法帖)인 ‘악의론(樂毅論)’에서 필력(筆力)을 얻었다는 그의 글씨는 ‘옥동체(玉洞體)’로 불리는 개성적인 서체를 개척해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적인 서예이론·비평서라 할 ‘필결(筆訣)’을 남긴 선구적 인물이기도 하다. 필결은 탁월한 도학자로서 지니고 있던,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체계와 우리나라 및 중국 서예사에 대한 해박한 식견은 물론, 깊은 사색과 유명 필적을 두루 섭렵함으로써 형성된 체험적 심미안을 바탕으로 기술한 저술이다. 그는 필결에서 시간이 흐르며 개성 없는 서풍으로 전락한 조맹부와 한호의 서풍에 대해 극렬하게 비판했다.

성재(省齋) 허전(1797~1886)은 옥동의 행장(行狀)에서 그의 글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선생은 필법에 있어서도 그 묘한 경지에 깊이 나아갔으니, 매산공(옥동 부친)이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왕희지가 쓴 악의론을 구입해 왔기 때문에 선생은 여기에서 필력을 얻은 것이다. 글자가 클수록 획은 더욱 웅대하고 걸출해 은으로 만든 고리나 철사로 꼰 새끼 같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질서가 있어 태산같이 높은 산이 하늘까지 높이 솟아 우뚝 선 것 같으며, 기세가 웅장하고 형상이 엄정하다. 나라 사람들이 선생의 글씨를 얻어 글자 하나하나를 보배로 귀하게 여기며 ‘옥동체’라고 했다. 동국진체는 옥동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후 공재 윤두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 등은 모두 그 실마리를 이은 자들이다. 원교가 일찍이 말하기를 ‘옥동의 글씨는 의론(議論)으로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다’라고 했다.”

그는 특히 큰 글씨에 뛰어났는데, 이런 옥동에 대해 조카인 이용휴는 “큰 글씨(大字)는 신라와 고려 이래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전도 행장에서 “대자와 해서는 물론 행·초서 모두 참으로 정체(正體)인데, 자획(字劃)과 체상(體像)이 크고 기세가 웅장하다”고 평했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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