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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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부인사에 전시된 초조대장경 금강반야바라밀경 목판본. 2011년 초조대장경 1천년을 맞아 제작된 것이다. |
대구시민에게 비슬산이 ‘어머니산’이라면 팔공산은 ‘아버지산’이다.
팔공산은 또한 대구의 진산(鎭山)이다. 대구·경북지역 시·구·군에 있는 초·중·고교 가운데 교가에 ‘팔공산’이란 지명이 등장하는 학교는 대구 439개교, 경북(경산·영천·군위·칠곡) 160개교 등 총 599개교나 된다.
역사적으로 팔공산은 신라인에게 ‘중악(中岳)’ 또는 ‘아버지산(父岳)’으로 불렸다.
팔공산 정상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천단이 있다. 즉, 신라인에게 팔공산은 영산(靈山)이자 호국의 성지(聖地)였던 것이다.
팔공산은 명장 김유신이 낭도시절 심신수련을 하면서 삼국통일의 꿈을 다진 곳이다. 팔공산 일대에는 김유신에 얽힌 여러 전설과 민담이 전해온다. 경산시 압량면에 있는 ‘김유신 화랑훈련장’을 비롯해 군위군 효령면의 ‘장군동’과 ‘김유신 사당’, 경산시 와촌면의 ‘불굴사 석굴’,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의 ‘오도암’ 등지에서도 김유신과 관련한 설화가 많이 남아있다.
후삼국시대, 팔공산은 고려와 후백제 사이 건곤일척의 승부처가 된다. 만약 팔공산이 견훤에 패퇴한 고려태조 왕건을 지켜주지 않았다면 ‘고려’라는 나라는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팔공산 일대에는 왕건의 행적에 따라 지어진 지명과 전설이 숱하게 전해온다.
팔공산이 고려사에 재등장한 건 고려 현종 때다.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현종은 불력의 힘으로 거란을 물리치고자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초조대장경)을 만들도록 했다. 76년에 걸쳐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팔공산 부인사에 옮겨져 봉안됐으나, 아쉽게도 몽고의 2차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지고 만다. 만약 이 대장경이 남아있다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됐을 것이다.
고려시대 팔공산의 신령은 ‘공산대왕’으로 받들어져 숭배의 대상이 됐다. 최씨 무신정권 시대, 이규보는 경주와 영천 등지에서 일어난 농민항쟁과 ‘신라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팔공산에 와 공산대왕에게 수차례나 제례를 올렸다. 그는 팔공산의 영험함을 굳게 믿고 있었다.
조선시대 팔공산은 임란의병의 중심지가 됐다. 대구지역 의병은 두 차례나 팔공산에서 회맹을 하고 왜적을 물리치기로 결의했다. 이 가운데 동화사는 유정(사명대사)이 이끄는 승병의 지휘소가 됐다. 팔공산 가산산성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지휘소가 됐으며, 한때 경상감영이 들어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1919년 3월30일에는 동화사 학승 10명이 대구 덕산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각각 10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팔공산의 주능선인 ‘가·팔·환·초(가산~팔공산 비로봉~환성산~초례봉)’는 산악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등산코스다. 하지만 팔공산은 난개발로 인한 훼손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이에 지난해 팔공산 국립공원 승격 범 시·도민 추진위원회가 설립됐다.
전영권 위클리포유 대구지오(GEO) 자문위원은 “팔공산은 지역민에게 백두산만큼이나 중요한 산이자 스토리와 문화콘텐츠가 풍부한 산이다. 세계의 명산 팔공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난개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사람들이 햇빛과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듯 대구시민은 팔공산의 가치를 너무나 모른다”며 “팔공산보다 규모가 훨씬 작고 스토리도 빈약한 무등산도 국립공원이 됐는데 대구시민의 고향인 팔공산은 아직도 푸대접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주 위클리포유에서는 호국성지로서의 팔공산에 대해 조명해 보았다. 삼국시대 김유신과 중악의 이야기, 고려시대 부인사 초조대장경, 조선시대 의·승병에 관해 취재했다. 팔공산에 대한 자연지리와 생태 등에 관해선 다음 기회에 다룰 것이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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