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60411.010180755330001

영남일보TV

  • 눈물 훔친 추경호 “달성 발전 시계는 계속…고향 잊지 않겠다”
  • [직설사설] 지선 이래 역대급 주목…김부겸vs추경호 공략 집중 분석

[밥상과 책상사이] 호박범벅을 먹으며

2016-04-11
[밥상과 책상사이] 호박범벅을 먹으며

지난해 가을, 여든을 바라보는 형님과 누님이 직접 밭에서 키운 것이라며 늙은 호박을 가져 오셨다. 형님은 호박을 받쳐 놓을 수 있도록 짚으로 따뱅이(똬리)까지 만들어주셨다. 우리 집을 방문한 손님들은 커다란 누렁 호박을 보면서 물건이라며 놀라워했다. 시골 출신들은 어린 시절 호박꽃에 들어있는 벌을 잡으려고 꽃잎을 손으로 오므리다가 벌에게 쏘인 이야기를 가장 많이 했다. 연둣빛 애기호박을 살짝 볶아 얹은 국수를 논두렁에서 먹을 때의 맛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았다. 겨울 내내 호박은 옆에 있는 어떤 화분이나 도자기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갖가지 추억에 잠기게 했다.

지난주 아내가 형님이 주신 호박을 부엌칼로 뱅뱅 돌리며 긴 끈처럼 잘라 햇볕에 널었다. 다 마르면 분말로 만들어 수프를 해 먹기 위해서다. 누님이 준 호박은 큼직하게 썰어 범벅을 만들기로 했다. 호박씨는 프라이팬에 볶아 까먹기 위해 따로 말렸다. 황기, 대추 등을 넣어 달인 물에 껍질을 벗긴 호박을 넣어 삶았다. 그런 다음 대충 으깬 후 찹쌀가루를 약간 덩어리지게 풀고, 불린 콩과 고구마를 함께 넣어 다시 끓였다. 마지막으로 설탕과 소금으로 달기와 간을 맞추니 맛있는 범벅이 되었다. 큰 그릇에 담아 놓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나누어 주니 모두가 별미라며 좋아했다.

봄비가 내리는 아침 호박범벅 한 그릇을 들고 조그마한 마당에 나서니 갓 피기 시작한 붉은 하트 모양의 금낭화가 눈에 들어오고, 다른 봄꽃도 촉촉이 젖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모든 초목이 힘차게 솟아오르며 저마다 한 번 봐 달라고 무언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모두를 한 번씩 바라보다가 옥잠화에서 눈길이 멈췄다. 누님이 심어준 것이다. 고향 집에 있던 것이라며 엄마가 생각날 때 보라고 했다.

어머니는 동네 꽃 박사로 통했다. 날이 풀리면 마을 아낙네들은 꽃모종을 얻으러 우리 집에 왔고, 어머니는 화분과 밑거름도 나누어 주었다. 어머니는 모종을 나누어 줄 시기에는 늘 호박범벅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곤 했다. 가난한 동네였지만 어느 골목이나 꽃이 가득하여 아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귀한지 의식하지 못했지만 항상 꽃 속에 파묻혀 살았다. 지금도 고향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보면 어느 골목, 어느 집에 무슨 꽃과 나무가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봄이 와도 별다른 행사가 없으니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봄은 밋밋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주말에는 온 가족이 교외로 나가보자. 양지바른 논두렁이나 언덕배기에 편안히 앉아 온갖 봄꽃과 아지랑이, 먼 산의 복사꽃을 같이 바라보자.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은 우리의 눈을 피곤하게 하지 않고 두뇌도 혹사시키지 않으면서 우리의 정서를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부모 자녀가 함께 봄나물을 캐고, 화전놀이도 해보자. 자연의 품에 안기면 잠시나마 공부와 시험, 삶의 고단함 따위는 잊게 되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연두와 초록의 향연이 눈부신 봄이 무르익고 있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시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