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게 직언 않는 신하들 정면 비판…하위지 급제 답안 조정 뒤흔들어
하강지=[문과] 세종 11년(1429)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9위
하위지=[문과] 세종 20년(143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
하기지=[문과] 세종 20년(1438)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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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계 하위지가 장원급제 후 금의환향할 당시 기념식수로 심었다는 회화나무. 장원방 일대인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에 있는 나무로, 이 마을에서는 예부터 ‘하위지 장원급제 나무’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민가 담벼락에 끼여 위태롭게 서있는 것은 물론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생육상태마저 나빠 보인다. |
장원방의 최고 명문가로 꼽히는 진양하씨(晉陽河氏) 집안 하담(河澹)은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하강지(河綱地)를 비롯해 사육신으로 유명한 둘째 하위지(河緯地), 셋째 하기지(河紀地), 넷째 하소지(河紹地)가 그들이다. 4형제 모두 선산 장원방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장원방은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옛 영봉리로,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를 말한다.
4형제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력했다. 아버지 하담과 외할아버지 유면이 태종 때 과거시험에 나서 각각 부장원과 장원을 했으니(영남일보 7월28일자 13면 보도), 대를 이어 집안의 명예를 높이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둘째 하위지는 태어날 때 집 앞 시냇물이 사흘간 붉게 물들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연유로 훗날 하위지는 자신의 호를 단계(丹溪)라 지었고, 집 앞 시냇물은 지금 단계천으로 불린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바람대로 4형제 중 무려 3명이 과거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첫째 하강지가 세종 11년(1429)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둘째 하위지는 세종 20년(1438) 식년시 을과(乙科)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했다. 당시 하위지가 내놓은 시험 답안은 조정을 뒤흔들 만큼 파장을 일으켰다. 신하들의 과실과 무능함을 정면으로 비판한 답안 내용 때문에, 대간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사직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셋째 하기지도 형 하위지와 같은 해 시험에서 병과(丙科) 5위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막내 하소지 역시 생원시까지 합격했다. 하지만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꾀하다 하위지가 처형되면서 4형제는 물론 집안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다.
#1. 붉은 물이 흐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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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부터 하강지·하위지·하기지 형제의 과거급제 이력이 적힌 국조문과방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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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계하위지선생유허비(丹溪河緯地先生遺墟碑). 하위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유허비로 장원방 일대인 구미시 선산읍 완전리 비봉산 자락에 있다. |
집 앞 시냇물이 붉게 물들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시작된 이변이 무려 사흘간에 이르자 길조인지 흉조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강보의 아기는 아랑곳없이 잘 울고 잘 먹었다. 그리고 이 아기는 훗날 자신의 호를 ‘붉을 단(丹)’과 ‘시내 계(溪)’를 써서 단계(丹溪)로 지었다. 하담(河澹)의 아들이자 유면(兪勉)의 외손으로 영봉리에서 태어난 단계 하위지(河緯地)는 1412년(태종 12), 세상에 나오던 그 순간부터 이처럼 수많은 이야기들을 끌고 다녔다.
하담의 네아들 중 3명이 ‘과거급제’
첫째 동복현감, 셋째 성균학유 지내
둘째 하위지 태어나자 냇물 붉어져
호는 단계, 냇물은 단계천이라 불려
대간들 사직소동 일으킨 일화 유명
단종복위 꾀하다 멸문…숙종때 복권
하위지는 유년도 남달랐다. 어찌나 독서를 좋아했던지, 형 강지(綱地)와 더불어 책에 열중하느라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어쩌다가 형제를 마주한 이웃들이 “뉘집 아인가” 하며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아우 기지(紀地)와 소지(紹地)도 영특하고 진중했으니, 영봉리가 4형제에 대해 가진 기대가 자못 컸다.
그러던 1426년(세종 8), 하위지가 14세가 되던 해에 형 강지가 소과(小科)에 합격해 생원이 되었다. 식년시가 3년에 한번씩 치러지는 시험이었던 만큼, 하강지는 정확히 3년 후에 대과(大科)에 도전했다. 1429년(세종 11) 4월7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기유11년방(己酉十一年榜)이 치러졌다. 이날, 시험관으로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신상(申商),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회(尹淮), 동지총제(同知摠制) 신장(申檣)이 독권관(讀卷官)으로 나왔고, 대독관(對讀官)으로는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윤수(尹粹)가 나왔다. 임금이 직접 참석해 지켜보는 시험이었기에, 제출된 답안을 왕 앞에서 읽고 그 내용을 설명한다 해서 독권관, 대독관이라 했다. 그리고 책문(策問, 논술)의 주제로는 제도·조묘·군현·관직(制度·廟·郡縣·官職)이 제시됐다. 하강지를 비롯한 응시생들이 일제히 고개 숙여 답안을 채우기 시작하자, 그들의 머리 위를 세종의 따뜻한 시선이 찬찬히 훑어갔다. 이윽고 나흘 뒤인 4월11일, 합격자가 발표됐다. 하강지가 동진사(同進士) 9위였다.
#2. 조정을 뒤흔든 과거 답안
하위지·기지 형제도 차근차근 입신의 단계를 밟아갔다. 하강지가 출사하고 6년 뒤인 1435년(세종 17)의 소과에 합격해 나란히 생원이 된 데 이어, 1438년(세종 20)에도 대과에 함께 도전했다.
그해 4월11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무오20년방(戊午二十年榜)이 실시됐다. 시험관인 시관(試官)으로는 판중추(判中樞) 허조(許稠)가 나왔다. 책문(시험문제)의 주제는 왕정손익(王廷損益)이었다. 책문 중에는 신하들을 감찰하고 임금을 비판하는 것이 소임인 대간(臺諫)에 대해서 “대간이란 임금의 눈과 귀이며 조정의 실로 중요한 인사다. 한데 근래에는 보통 관원과 다를 것이 없으니, 어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도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하위지는 대략 이러한 논지의 답안을 내놓았다.
“옛날만 해도 대간은, 그 어떤 위협 아래서도 그 일신을 돌아보지 않고 기탄없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밝으신 임금님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 모든 일이 잘 다스려지고 있으니 진실로 말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대간의 입장에서도 말할 만한 일이 없다고 한다면 너무나 무관심한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흥천사(興天寺) 중수공사의 경우, 재해구제와 흉년에 대비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큰 공사를 일으켜 백성에게 손실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전에 나아가 성상의 옷깃을 끌며 그 폐해를 극구 아뢰는 자가 없으니, 이 어찌 아쉽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위지가 거론한 흥천사는 태조가 자신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7년(태조 6)에 완공한 사찰로, 당시 세종의 명으로 중수공사하는 데 막대한 경비가 지출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 대간이라는 자들이 만류하지 않고 보고만 있느냐는 비판이었다.
시험관 허조가 “대간들이 하위지의 답안을 보면 부끄러울 것이다. 그들의 잘못을 참으로 적중히 찌르지 않았느냐”며 감탄했고, 영의정 황희(黃喜)도 칭찬하며 으뜸으로 밀었다. 이로써 하위지는 4월17일의 합격자 발표장에서 을과(乙科) 장원(壯元)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아울러 아우 기지도 병과(丙科) 5위로 급제했다.
문제는 하위지의 답안이 알려진 후였다. 자신들의 무능함을 꼬집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 대간들은 심기가 극히 불편했다. 이에 벌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돌이켜보건대 심히 죄송스럽고 부끄러워 감히 더는 직임을 더럽히지 못하겠나이다”라며 사직을 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사뭇 반성처럼 보였지만, 기실 그것은 어깃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대간들을 보며 세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과거를 통해 대책(답안)을 시험하는 것은 그 직언을 구할 따름으로, 하위지의 책문은 매우 취할 만하다. 또 그가 무릇 간관의 과실을 논한 것뿐이거늘 어찌 노여워한단 말인가.”
그러고는 하위지를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종6품)에 임명했다. 이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고, 농사를 장려하는 권농교서(勸農敎書)를 짓는 등 세종의 신임을 얻었다.
#3. 폭풍전야
하위지가 세종 곁에서 수많은 공적을 이루는 동안, 형 하강지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전라도 동복현감(同福縣監) 등을 지냈다. 동생 하기지도 성균학유(成均學諭) 등에 이르렀다. 당연히 막내 하소지도 과거에 응했다. 1447년(세종 29), 사마방목정통12년아세종대왕29년정묘식(司馬榜目正統十二年我世宗大王二十九年丁卯式)이라는 긴 이름의 생원진사시가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급제해 생원이 됐다. 이후 막내 하소지는 대과를 찬찬히 준비해 갔다.
그렇게 4형제가 최선으로 삶을 지켜나가는 동안 세종과 문종이 죽고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었던 하위지는 정치를 접어야 할 때임을 깨닫고 곧 행동으로 옮겼다. 1453년(단종 1) 7월24일, “다리에 병을 얻어 마디마디 시리고 아픈 것이 걸을 수조차 없으니 요양을 해야겠습니다” 하고는 고향 선산으로 내려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0월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면서 권력은 사실상 수양대군 손에 떨어졌다. 그런데 며칠 뒤 하위지에게 “병을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오라”는 어명이 날아왔다. 수양대군이 그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하위지가 ‘억지로 출발했다가 증세가 더 심해졌다’며 요양을 청하자 한발 물러선 명이 경상도관찰사에게 전해졌다.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고 술과 고기를 보내 보양하게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역시 수양대군의 입김이었다.
#4. 사육신의 이름으로
수양대군은 끈질겼다. 단종 말년에 하위지에게 예조참의(禮曹參議·정3품)를 제수한 데 이어, 자신의 즉위 후에는 예조참판(禮曹參判·종2품)의 직을 내리면서 도성으로 돌아올 것을 내내 종용했다. 결국 하위지도 마지못해 명을 받아 입궐했다. 하지만 세조의 것은 받을 수 없다며 녹봉을 사용하지 않고 따로 저장해두었다. 그러고는 은밀히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다. 그러다 결국 들통이 나면서 처벌을 받게 되었으니,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456년 6월8일, 세조에게선 살기가 흘렀다.
“친자식들을 모조리 연좌시켜 교수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 처첩, 조손(祖孫), 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은 변방고을의 노비로 영속시키며, 16세 미만인 자는 나이가 찰 때까지 지방에 살게 하다가 멀리 안치시키라.”
형은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집행되었다.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군기감 앞길에 빙 둘러선 가운데 거열형(車裂刑, 죄인의 팔다리를 각각 수레에 묶고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서 찢어 죽이는 형벌)이 가해졌고, 그 화는 하위지의 세 형제에게도 미쳤다. 특히 막내 하소지는 대과를 준비하다 화를 당해 과거급제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또한 선산에 있던 하위지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처형당했으며 딸들은 노비로 전락했다. 다행히 하강지의 아들 하분과 하기지의 아들 하포, 하귀동은 16세가 되지 않은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귀동은 훗날 이름을 하원으로 개명하고 하위지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다. 그리고 하위지는 숙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됨과 동시에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의 맥락,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공동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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