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동상가 극동TV 강연석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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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세기를 넘긴 미제 흑백 TV를 처음 입양했을 때 교동상가 상권은 해가 지지 않을 것처럼 치솟았다. 그시절 금쪽 같았던 그 TV가 이젠 돌보다 못하지만 그는 자식처럼 품고산다. |
난 아무래도 기술자의 유전자를 가졌던가 봐. 특히 전기공학에 흠뻑 빠져버렸지. 나주중학교 시절 난생 처음 ‘광석(鑛石) 라디오’라는 괴물을 만나게 됐어. 어느 날 학교 정문 한 기둥에 기다란 철 막대기가 보였어. 저게 뭣에 쓰이는 물건이지? 거기 철선이 왜 땅에 파묻혀 있는지도 궁금했어. 다른 애들은 모두 무심했는데 난 그 용도를 알기 위해 혼자 만지작거렸지. 한 일본 선생이 그런 날 교무실로 데려갔어. 내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했던 거지. 그 철 막대기가 피뢰침이란 걸 알게 되었어. 그 라디오 때문에 내 천직도 일찌감치 결정돼 버렸어. 아득히 먼 곳의 음성을 허공에서 수신할 수 있다는 데 충격받았고, 난 그 원리가 뭔지 알고 싶어 미궁 같은 전기·전자공학 속으로 파고들었지. 한때 난 ‘나주의 에디슨’이란 소리도 들었어.
전남 나주 유복한 집 6남매 중 둘째로
중학생 시절 ‘광석라디오’ 보곤 매료
원리 알려고 전기·전자공학 공부 매진
한때 ‘나주의 에디슨’으로 불릴 정도
나주군 기술직 공무원으로 사회 첫걸음
열심히 할수록 입지 좁아지는 상황 고민
“대구서 기술 맘껏 펴보라” 인척 권유에
1966년 校洞 와 한창 땐 직원 10여명 둬
금성사 직원도 못 고친 TV 수리 기술
거금·기술이사로 와 달라는 제의 받아
LCD·LED 첨단제품도 응용하면 다 돼
나 아니면 안될 물건 때문에 오늘도 여기
◆ 추억의 광석 라디오
세계 최초의 방송이 궁금했지. 방송의 역사를 알기 위해 관련 책들을 혼자 뒤적거렸어. 1920년 11월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웨스팅하우스 빌딩 옥상 천막 스튜디오에서 처음 실시됐더라고. 1927년 2월16일 오후 1시 호출부호 JODK 경성방송국이 한국 첫 방송 전파를 송출하지. 한국 첫 TV방송은 KBS의 전신인 <주>대한방송(DBS).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운영한 이 방송국은 원래 보신각 자리에 있었는데 미국 RCA 서울 대리점에서 1956년 5월31일 탄생된 KORCAD-TV를 모태로 하지. 대한방송은 이후 불타 없어지고 그 방송국 재원이 고스란히 1961년 12월31일 개국한 KBS로 이전됐어.
아무튼 추억의 라디오 그 원형은 분명 ‘광석 라디오’였어. 1940년대 초 그 라디오로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으려고 단파방송 청취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도 적잖았어. 1912년 타이타닉 침몰 당시에 구조선의 생존자 명단을 모스부호로 수신한 것도 광석 라디오였지.
난 대학을 가지 않았어. 그 시절에는 중학교 6년 교육만 받아도 고등교육을 받은 거나 진배없었지. 시험 치지 않고 공무원도 교사도 될 수 있던 시절이었어. 당시 부모들에겐 아이 학교 보내는 것보다 땔감 구해오고 소 먹을 꼴 베어 오는 게 급선무였어. 초등학교조차 못 가는 애들이 수두룩했어. 난 나름대로 엘리트였지.
나주중학교 전기과에 들어갔어. 첫 화두는 바로 ‘전기의 출처’. 그게 자력에서 생긴다는 걸 알았지. 그 자력 주위에서 전기가 생겨나고. 신기했어. 구리코일과 철심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전기를 만들어 보기도 했지.
논산훈련소에서 군번(10201029)을 받았지만 48㎏이란 저체중, 그리고 영양실조. 난 급히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후송됐어. 제대한 뒤 전기 덕분에 나주군 기술직 공무원이 됐지. 관내 이런저런 전기공사를 도맡았어. 나주군청 1호 전기전문가인 셈이지. 당시엔 전력이 워낙 부족해 전구도 30촉(30W) 이하로만 사용해야 됐어. 전구 속 필라멘트도 너무 자주 끊어져서 전구 교체하는 게 주 업무였어. 군 소재지에만 겨우 전기가 흘렀고 다른 시골은 ‘호롱불시절’이었지.
난 술도 먹지 못하고 오직 맡은 일에만 올인했어. 그런데 다른 직원들은 모두 대충대충이었지. 내가 워낙 야무지게 일을 했고 그들은 항상 윗사람으로부터 꾸지람을 당했어. 일을 열심히 할수록 설 자리는 더 좁아졌어. 고민의 나날이었지. 그냥 사표를 썼어. 그리고 미래가 보장된 대구로 갔지. 공직에서 시장으로 걸어간 거야.
◆ 한국 첫 TV…그리고 대구행
1966년. 대구에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어. 대구경찰서 소속 한 인척이 궁벽진 호남에 있지 말고 경기 좋은 대구로 와서 기술을 맘껏 펼쳐볼 것을 권유했지. 그렇게 해서 교동시절이 시작된 거야. 동대구역·대구백화점·동아백화점도 없던 시절, 도심만 조금 번창했지 반월당만 넘어가면 시골이나 진배없던 대구였어. 그래도 대구는 섬유경기 등으로 알부자는 엄청 많았지. 하지만 한국 가전제품만은 동굴에서 벗어나 겨우 걸음마를 시작할 때였어.
아폴로전자 홍성규 사장 밑에서 일을 시작했지. 그때만 해도 일반 가정에서 TV는 언감생심. 다들 저급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시절이었어. 고급 라디오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이 교동상가에 와야지. 그땐 미제 라디오 제니스(Zenith)가 대장이었어. 제니스는 미군부대 PX를 통해 나와 음성적으로 유통되었지. 제니스.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고물 같지만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요즘으로 말하면 신형 스마트폰 같은 거였어. 문제는 가격. 초창기 암시장에서 45만환에 팔렸는데 이는 당시 쌀 50가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지. 그런데 금성사가 구국의 일념으로 팔을 걷어붙였어. 국내 첫 국산 라디오 제작에 나선 거지. 천신만고 끝에 1959년 11월15일 ‘금성 A-501’이 탄생하지. 나도 나주군청에 있을 때 그 라디오를 봤어. 기적 같은 물건이었지. 이 라디오가 처음 선보일 당시 첫 해 생산량은 불과 87대. 가격은 2만환. 당시 금성사 직원 월급이 약 6천환이었어.
하지만 판로가 막막했어. 직원들이 종일 청계천 일대의 전파사를 돌아다녔지만 상인들은 ‘국산 라디오를 어디에 쓰겠냐’며 머리를 가로저었어. 전력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100V 전압을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방송국 사정도 열악해 서울 외곽으로 조금만 나가도 전파를 수신할 수 없었지. 이처럼 시장에서 고전하던 금성 라디오를 살린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어.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그는 곧 부산 연지동에 있던 금성사를 방문, 실무자에게 “어떻게 하면 전자산업을 살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설계 책임자였던 김해수 과장이 “밀수품과 미국 면세품 유통을 막아야 살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해. 곧 전국 농어촌으로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벌어지지.
◆ 초창기 교동상가 이야기
내가 교동상가에 등장했을 때 우리 상가보다 양품점 상가가 더 성시였어. 하지만 나중엔 우리 상가가 주도권을 따라잡지. 당시 상가에는 아폴로를 비롯해 명성, 대동, 영남, 문화, 교동, 대구 등의 소리사가 있었어. 나중에는 수백 곳으로 번져가지. 하지만 그때 사장 중 지금도 현역인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아.
이들 소리사가 서울에서 내려온 각종 라디오, 전축, TV 등을 팔았지. 일반 대리점에선 새것, 교동에서는 면세로 나온 새것, 새것 같은 헌것을 주로 취급했지. 교동상가는 정법과 탈법 사이에서 외줄걷기를 한 거야. 그런 교동을 나무라는 이도 있었지만 그건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지. 어떤 상권이란 건 바로 동시대 사람들이 만든 거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야. 우리 상가의 강점은 ‘수리인프라’였어. 고장 난 물건은 무조건 우리 쪽으로 갖고 와야지. 고장 난 물건을 위한 ‘종합병원’ 같은 곳이었어. 한때 ‘서울 세운상가에서 못 고친 물건도 여기 오면 고칠 수 있다’는 말도 들었지.
교동상가는 불이 꺼지지 않았지. 24시간 풀가동시스템이야. 난 보름 정도 아폴로에 있다가 다른 소리사로 스카우트되지. 난 고장 난 구조를 남달리 분석하는 안목이 있었어. 그래서 날 탐냈던 것 같아. 내 기술을 알아보고 방까지 제공했어. 서울 세운상가로부터 고장 난 제품을 갖고 오면 그걸 고쳐주는 대신 일반 수리비용을 월급으로 가져가는 식으로 이면계약을 했어. 조금 있다가 동양TV로부터 가게를 30만원에 인수받아 옮겨 온 데가 바로 지금 내 일터야.
1969년 미국 아폴로 11호가 달나라에 갔을 때 교동상권은 또 한번 비약하지. 당시 시민들에겐 하나의 바람이 있었어. 암스트롱 선장이 착륙선에서 내려 달에 역사적인 인류의 첫 발자국을 찍는 실황을 TV로 시청하는 것이었어. 당시는 자가용도 아파트도 아니고 TV 가진 집이 ‘슈퍼갑’이었지. 돈깨나 있었던 사람은 묻지마 교동시장으로 몰려와 외제 TV를 구해 갔어. 수완 좋은 사장은 면세용 TV를 선점해 적잖은 판매수익을 거뒀어. 1960~70년대 교동상가 사장의 주머니는 항상 지폐투성이였다고 봐야지. 당시 황금동 등 변두리 집 한 채 가격이 100여만원인데 1개월만 벌면 그 정도는 너끈하게 벌었지.
수리 건수가 물밀듯 밀려왔어.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어. 작업대에서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지. 지금은 혼자지만 많을 땐 직원 10여명도 데리고 있었지. 당시 교동에선 금성, 삼성, 대우, 천우, 동남 등 참 많은 국산 TV가 유통됐어. 무슨 TV 브랜드가 그렇게 많았던지…. 1986~88년이 교동상권의 정점이었어. 88서울올림픽이 열릴 땐 없어서 TV를 못 팔았지. 이때 비로소 국내 TV가 외제를 압도하기 시작해. 한때 교동에서 물건을 사는 게 대리점에서 사는 것보다 더 낫다는 인식도 있었어. 신혼부부도 어김없이 교동상가를 들렀지.
어느 날 일본과 기술 제휴된 14인치 흑백 TV가 일본에서 단종됐어. 금성사 직원도 못 고친 걸 나는 일제 부품 없이도 구조만 변경해 고칠 수 있는 ‘파생기술’을 확보하게 됐지. 그 소식을 접한 금성사 고위 인사가 나를 기술이사로 영입하려고 찾아왔어. 기술이전 조건으로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했어. 난 거액과 인연이 없었지. 사실 그 기술은 내 게 아니지. 다른 기술자와 공유하고 싶었어.
이젠 교동상가도 예전 같지 않아. 그 한 축이 1990년대 중반 북구 산격동 대구유통단지로 가버렸어. 신혼부부 특수도 사라지고 수리문화까지 퇴조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동안 TV 제작기술도 첨단화돼 LCD에 이어 LED로 접어들었어. 하지만 난 걱정 안 해. 응용하면 다 고칠 수 있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시에 주무를 수가 있는 난 ‘디지로그 할배’야. 기본기가 탄탄해서 가능한 거지. TV는 크게 전원부, AD보더, 승압기, 패널 등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패널부가 고장 난 건 나도 못 고쳐. 하지만 다른 부위는 다 고칠 수 있어. 고쳐주고 수리비 포함 12만~13만원 받아.
위만 쳐다 보고 사는 청년백수에겐 여기가 ‘암흑’일지 몰라. 하지만 기술은 결코 외롭지 않지. 요즘 청년들한테 한마디 하라고. 그래, 해줄 말 있어. ‘궂은 일로 기본 다지면 말년이 다복해진다’는 것.
종일 손님이 없을 때도 있어. 하지만 나 아니면 고칠 수 없는 고장 난 물건 때문에 난 문을 쉬 못 닫지. 여긴 내 직장이 아니야. 내 놀이터야. 전자와 전기가 존재하는 한 내 길에서만은 절대 해가 저물지 않아!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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