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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명 <대구미술관 학예실장> |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수평적 시간이고, 또 하나는 수직적 시간이다. 수평적 시간은 일상적 시간이다.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친구와 대화하고 노는 시간이다. 모든 시간은 수평적으로 흐른다. 그런데 수평적으로 흘러야 할 시간이 잠시 멈추다 고양되어 급기야 수직적으로 솟구치는 시간이 있다. 이를 수직적 시간이라고 한다. 수직적 시간은 시적 시간이라고도 한다. 시적 시간은 종교적 시간과 비슷하다. 어떤 시문학과 만나서 감동했을 때 우리는 일상을 잊고 나의 의식은 시인이 바라본 세상으로 빨려 들게 된다. 종교적 체험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일상의 시간을 잊고 신성한 영역으로 진입한다.
그리스어로 프네우마(Pneuma)는 숨결이나 호흡을 뜻한다. 프네우마는 종교적 맥락에서 하느님의 숨결이다. 하느님의 숨결이기에 프네우마는 종교적 맥락에서 에센스(essence), 정령(spirit), 영혼(soul)의 뜻으로 확장된다. 대문자 ‘P’로 시작하는 하느님의 숨결 프네우마는 소문자 ‘p’로 시작되는 시인(poet)과 예언자(prophet) 혹은 성직자(priest), 목회자(pastor)에 분유(分有)된다. 시인은 가장 예민한 사람이다. 시인과 예술가는 같다. 하느님의 숨결을 가장 잘 느끼는 사람들이다. 발화하는 냉이 꽃이나 돌 틈의 이끼, 피부에 스치는 바람, 떠다니는 먼지 속에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이다. 세상의 아픔을 가장 먼저 느끼고, 기쁜 마음을 서로 공유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통찰력이다. 시인이 언어로 분절시킨 세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낀다. 화가의 손길에서 하느님의 숨결이 드러난다. 그 숨결을 타고 우리는 수직적으로 고양된다.
유식불교에서 우리의 의식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말나(末羅), 아라야(阿羅耶)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안, 이, 비, 설, 신은 우리의 대표적 감각 기관을 통해 얻어지는 번뇌다. 일상적 시간을 통해서 느껴지는 대다수의 기쁨과 번뇌가 여기서 비롯된다. 의는 우리의 생각과 사고에서 비롯되는 번뇌이며 말나는 지나친 자기 애착의 번뇌다. 아라야는 태초부터 우리가 지녔던 원죄적 번뇌다. 새벽에 예불을 드리며 삼천 배를 올리면 온몸이 땀에 젖고 여덟 개의 식(識)은 어느덧 사라진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과 마주할 때 우리는 고흐가 1888년 화면 앞에서 펼쳤던 물리적 동작과 붓질을 만난다. 그 붓질은 단순히 그림 그리는 행위가 아니다. 고흐가 현실의 수평적 시간에서 떨어져 한없이 고양되어 누렸던 지복(至福)의 수직 시간이다. 우리가 그 그림을 본다는 것은 고흐가 1888년에 누렸던 아주 특별한 시간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진명 <대구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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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시간의 두 종류](https://www.yeongnam.com/mnt/file/201812/20181231.01020080422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