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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타 쓰요시<화가> |
네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문득 한글로 쓰인 간판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외국이구나.” 갑자기 일상이 신기하게 보인다. 수많은 우연과 선택 속에서, 나의 현재가 있다. 나의 한국에서의 생활도 올 봄에 20년째가 된다.
1994년 봄, 나는 나가사키대학교 교육학부 2학년이었다. 1학년 때는 교양수업밖에 없었고 미술과 접할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미술코스를 배웠지만 그림 실력이 늘지 않아미대 진학은 포기하고 교육학부로 진학했다. 그렇다고 해서 교사가 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원 수요가 줄어 교사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장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있었다. 한일교류전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시기였다.
그것은 이카와 세이료 교수님이 담당하는 소묘 수업이었다. 경북대와의 교류전이 여름에 대구에서 열리니 참가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관심은커녕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당시 나에게 한국이라고 하면 한글이라는 기묘한 문자와 구속복을 입은 전직 대통령, 그리고 서울올림픽 때 벤 존슨의 압도적인 달리기와 실격 정도였다. 이카와 교수님이 참가 희망자를 묻자 2학년 25명 중에서 손을 든 것은 나를 포함해 2명이었다. 그 후 소묘 수업에서는 교류전 설명회가 매주 진행되었다. 참가경험이 있는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경북대 학생들이 촬영, 편집한 비디오를 봤다. 배경음악이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었던 게 인상적이었다.
한국에 가는데 돈이 필요했다. 여권 신청비 1만엔, 비행기값 2만5천엔, 호텔비 1만엔, 거기에 체재 비용이다. 다른 동기들이 바로 손을 들지 않은 건 이런 이유도 있었다고 나중에 깨달았다. 그때 이미 5월이었고 교류전은 7월초. 1993년의 일본은 쌀이 부족해 태국에서 인디카쌀을 수입하였다. 당시 쌀을 살 때 인디카쌀을 같이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했고, 그 쌀을 두고 가는 사람이 있어 나는 시장에서 그 쌀을 공짜로 얻어서 식비를 절약했다.
아르바이트는 호텔의 연회 서비스를 하기로 했다. 결혼 피로연 등 파티에서 식사를 나르는 일로 원래는 연수를 받고 일을 시작하는데, 결혼식 시즌이라서 아무것도 모른 채 일하다가 갈 때마다 혼났다. 게다가 월급은 월말 40일 후에 지불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첫 월급은 내가 한국으로 떠난 뒤에 받을 수 있었다. 결국 돈은 안 들어오고 아르바이트는 바쁘고 꾸중 많이 듣고 배가 고픈 상태를 2개월 참고 나는 한국으로 출발했다.가와타 쓰요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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